Oon-publication

#Memory Essay50개의 글

그해의 인연들에 감사하며

그해의 인연들에 감사하며

촌지 어느 한 기업과 관련하여 내가 쓴 기사가 인쇄되던 날, 나는 신문 몇 부를 그 회사에 전달해 주러 간 적이 있다. 자세하게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누군가에게 갓 나온 신문을 건넨 후 접견실로 안내받아 잠시 기다렸다. 그 회사는 취재를 위해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와는 달리 조금 정중한 대접을 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위 중앙 메이저 신문사 기자가 아니면 어디를 가나 제대로 된 대접을 기대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더구나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삼류의 허접한 신문사 기자 아닌가? 그런데도 자신이 일류 신문사 소속인양 거들먹거리는 사이비 기자들이 당시에는 많았다. 사실 일류든 삼류든 거들먹거린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유리한 위치를 이용해서 상대에게 위압을 행사해 자신에게 이로운 뭔가를 얻어 내려는 수작에 불과하므로 메이저든 아니든 그런 자들은 모두 사이비 언론인이다. 몇십 분이 흘렀을까, 그곳의 고위 임원인듯한 사람이 나에게 흰 봉투를 건넸다. 내가 그 회사를 취재할 때 사

47분 분량

내 소꼽친구들

나의 초등학교 동기 졸업생, 스물 아홉 명 중에 슬프게도 먼저 떠난 이들이 몇 있다. 전말 옹구마을에 베드로와 인수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햇골 주호가 사십대에 또 세상을 떠났다. 어디에선가 살아 있겠지만, 더 이상 연락이 닿지 않는 친구들도 여럿 있다. 뒷골 창규가 그렇고 햇골 상근이, 그리고 일흥개 광수가 그렇다. 반면에 이사를 떠나면서 같이 졸업을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우정을 함께 나누는 친구들이 몇 있다. 연숙이가 그렇고 선영이, 순녀가 그렇다. 아, 인옥이도 졸업 전에 서울로 이사를 갔던가? 오십이 넘어서 카톡에 단체방을 만들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스무명 정도이다. 숫자만큼이나 아주 다양하게 사는 것 같다. 고향이나 속초 주변에 그대로 남아 있는 친구들도 있다. 남자로 중에는 일흥개 길호와 행돈의 해용이가 그렇다. 그리고 뒷골의 주원이, 햇골의 종현이, 귀향을 한 태수가 그렇다. 여자들 중에는 정희도 그렇고 경옥이도 그렇다. 그러고 보면, 나와 같이

9분 분량
낯선이와 함께

낯선이와 함께

지금은 80번 인터스테이트(Interstate) 고속도로를 타고 동쪽으로 달리고 있다. 나는 어느 낯선이가 운전하는 화물 트럭 조수석에 앉아 있다. 왼손만을 이용해서 익숙하게 운전하고 있는 그는 턱수염이 수북하게 얼굴을 덮고 있는 삼십대 후반 쯤으로 보이는 백인 사내다. 추위를 타지 않는지 운전석 쪽 문을 살짝 열어 놓고 있다. 차가 거의 70 마일속도로 달리고 있어서 차가운 바람이 연신 쏟아져 들어 오고 있다. 나는 이 차가 주유소 주차장을 벗어나 고속도로를 들어설 때부터 목도리와 두꺼운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온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집을 나선 것은 오후 1시 30분 쯤이었을 것이다. 딸 아이가 내게 전화를 걸어 온 후로부터 10분 쯤 후에 출발을 했었다. 전화가 걸려 올 무렵에 나는 아내와 점심을 마친 후, 이를 닦고 세수와 면도를 막 마쳤을 때였다. 나는 통화를 하기도 전에 어떤 상황이 일어 나고 있을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벌써 한 달도 더

11분 분량
이수역에서

이수역에서

사당역에서 / 황영주 마감역은 따뜻하다 다정한 그이를 붙잡고 졸다가 놓친 정거장을 이야기하면 삶은, 비로소 웃음이 된다 처음역은 기다린다 누군들 실수가 없으랴 겉돌고 헤매다 간신히 딛고 서면 삶은, 날마다 새 걸음이다 At Sadang Station / Hwang Young-ju The final stop is warm Embracing the tender lover Talking of missed stations As we doze and slip Life finally finds its laughter The first stop waits For who is free of errors? Wandering and lost When we barely stand and tread Life, each day, is a new step. 조금 전에 나의 여동생의 카톡(한국의 WhatsApp)에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들을 넘기면서 보다가 “사당역에서“라는 제목의 시를 읽게 되었다. 내 여

12분 분량
Thanksgiving Holiday in Ithaca, NY

Thanksgiving Holiday in Ithaca, NY

우리 식구가 묶고 있는 이타카 시내 한 호텔에서 바라본 전경. 코넬대학교가 언덕 맨 위에 보인다. 땡스기빙을 맞이하여 이곳에서 이틀을 지내고 있는 중이다. 그저께 저녁부터 갑자기 정전이 되는 바람에 큰 불편을 겪었다. 우리 집 스트리트 앞에서 자동차가 전봇대를 들이 받는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그 바람에 정전이 되면서 밤새도록 경찰차, 소방차 등이 오갔는데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복구되었다. 우리는 다음날 아침 일찍 딸이 있는 이타카로 휴가를 떠날 예정이어지만, 11시 무렵에서야 겨우 출발을 할 수가 있었다. 도중에 눈이 내리고 날씨가 크게 내려갔는데 현지에 도착해서도 달리 즐길만한 도시는 아니었으므로 날씨에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우리는 어제 오후 늦게 도착해서 루비와 함께 늦은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다 함께 호텔로 돌아와서 딸은 수업 준비를 하다가 학교 스튜디오로 돌아갔다. 사진에서 보이는 곳이 딸이 밤샘을 하는 스튜디오가 위치한 곳이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 시간을 보내

17분 분량
무제: 그리움

무제: 그리움

https://youtu.be/YDu8vhvDqEY 밤 늦도록 망상을 떨다보면 감상에 빠질 가능성이 농후해진다, 비록 의학적인 근거는 없지만. Netflix에서 이병헌과 조성우 주연의 영화 <내부자들 Inside Men, 2015>이라는 영화에서 이병헌이 자주 듣고 부르는 <봄비>라는 노래가 있다. 낭랑 18세의 이은하가 부른 노래다. 정말, 잘 부른다. 감칠 맛이 난다. 쿠싱증후군을 앓고 있다는 이은하의 노래 중 요절한 천재, 장덕이 작곡한 노래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의 가락과 노랫말은 아름답다. 장덕이 자신의 절친인 이은하를 재능이 있는 가수로 인정 받게 한 곡이기도 하다. https://youtu.be/m9OKoFgPTKI https://youtu.be/9T7vm50soMc 장덕의 <소녀와 가로등>은 내가 중학생일 때 세상에 나왔다. 얼마나 많이 듣고 또 흥얼거렸던가.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나보다 두 살 위로 여전히 멋지게 활동하고 있을 것이다. https:/

3분 분량
고통의 시간 뒤에 따라온 여유

고통의 시간 뒤에 따라온 여유

낮에 루비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주 잠깐 통화를 했는데 무려 15시간이나 잤다면서 히스토리 시간에 1분 늦어서 어쩌면 F 학점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 과목은 2번 수업에 빠지면 자동으로 F 학점으로 처리되는데, 늦잠을 자다가 그렇게 된 것이었다. 다만 지금까지 이 과목에서 A를 받아와서 어쩌면 구제될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그런 상황임에도 아이는 지금까지처럼 지치고 졸린 목소리와는 달리 아주 밝았다. 이유가 있었다. 지난 월요일에 마침내 스튜디오 과목의 파이널이 끝났는데 자기가 제일 마지막 순서로 봤으며 제일 잘 본 것 같다는 것이었다. 밤샘을 한 보람이 그녀의 목소리에도 묻어 났다. 5월 7일 월요일에 있었던 파이널 평가가 끝난 후부터 내리 잔 것 같다. 그렇게 간단하게 통화를 하면서 나는 연신 '다행이다.'라는 생각만 들었다. 무려 15시간이나 잤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래도 아직 열흘은 더 고생을 할텐데 기회가 있을 때 자둬야 할 게 아닌가? 일요일 아침 6시 반 무렵에

14분 분량
딸의 그림을 보다가

딸의 그림을 보다가

오늘은 무슨 자료를 하나 찾다가 어떤 폴더에서 딸 아이의 작품이 들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2003년이나 2004년에 그린 것들이다. 그 중에서 위의 그림은 아주 재미 있다. 고양자유학교 2학년에 다닐 때인 것 같다. 그리고 만든 날짜를 보니 이천사년 시월이십율일 화요일이라고 적어놨다. 은행잎은 노란색으로 씌여져 있어서 뭐라고 표현을 했는지 모르겠다. 단풍잎은 "초록색좋아색"이란다. 그 다음은 "친구사이색", "리자머리색!"이라고 표현한 것도 있다. 리자는 명진이와 같은 학년에 다닌 친구이다. 러시아에서 한국에 와서 체류를 하고 있었는데 부모가 합법적인 신분이 없어서 일반 학교에는 다닐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고양자유학교에서 리자가 무료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리고 "곶감색"이란다. 곶감은 아이의 할아버지께서 해마다 만들어 주신 것을 먹었으므로 기억에 남았던 것 같다. 다른 잎은 "나무껍질색"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마지막 잎새는 "입에묻은피색"이란다

56분 분량
사진 한 장의 확장성

사진 한 장의 확장성

위의 사진을 보니 옛 생각이 난다. 1998년 8월 어느 날이었다. 연세대학교 뒷 편은 연희동이라는 마을이다. 내가 연세대학교 미디어아트연구소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일을 할 때 만난 최모 여인의 집이었다. 당시에 나는 이 연구소와 함께 연세대에서 애니메이션 워크숍을 진행했었다. 그때 그분이 자신의 5학년 쯤 된 아들을 우리 워크숍에 보냈다. 그렇게 알고 지내다가 우리 가족을 자신의 집에 초대를 해서 식사를 대접했다. 연세대 뒷담 경계 근처와 맞닿아 있는 집이었는데 크고 아름다운 정원을 갖고 있었다. 사진 속에서 내가 딸 아이를 그네 태우기를 할 때, 그 집의 바둑이도 함께 앉아 있었나보다. 당시에 나는 서울 도심 한 가운데에 그렇게 큰 집이 있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단아하고 지적인 외모의 그 여인은 연세대 출신이었는데 그 후에도 나와는 자주 만났다. 어느 짧은 순간 나는 1989년 여름에 이 마을에서 하숙을 한 적이 있다. 내가 6개월 과정의 출판대학을 마치고 취직을 한 회사가

44분 분량
Game of Thrones II

Game of Thrones II

나는 며칠 전부터 머리를 비워야 할 일이 생겼다. 사람들은 그럴 때 술을 마시거나 줄담배를 피워대는 등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방법들을 사용할 것이다. 나는 딱히 스트레스를 해결하기 위해 특별히 동원하는 방법이 없다. 휴대폰을 쳐다봐도 이메일, 문자, 페이스북이나 블로그 정도 밖에는 없다. 내 휴대폰에는 그 흔한 무료 게임(기본으로 깔려 나오는 게임은 모두 초기화하여 죽여 놓는다)은 물론 나는 깔아 놓은 게임이 없다. 아예 게임을 하지 않은지 몇년 넘었다. 2015년에 게임하나를 해 본 것, 그리고 2013년에 게임의 한계를 넘어버린 Trap! 게임을 해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글은 Game of Thrones 으로 쓴 적이 있다. 그래서 Trap!을 다시 다운로드 받아서 심심풀이 땅콩으로 했다. 몇 년 만에 하는 것이지만, 방법을 알고 있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시간을 낭비하기엔 아주 적당한 게임이다. 스트레스도 없고 그다지 많은 운동신경을 쓰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6분 분량
단편 영화, 피아노

단편 영화, 피아노

"문화공간서울"이 재정 문제로 문을 닫고 나자 우리들은 동숭동 대학로로 자리를 옮겨 스터디 그룹을 이어갔다. 이 이야기는 앞서 우중산행(雨中山行) 에서 쓴 바가 있다. 당시에 대부분이 대학생이거나 무직이었으므로 정기적으로 만나서 스터디 그룹에 참여하곤 했다. 그러나 나는 직장을 갖고 있는데다가 제대로 영화 제작을 배워 보고 싶어서 봉천동의 한 우중충한 골목에 있던 또 다른 영화서클에서 영화 제작 공부를 했다. "지중해"인가 하는 영화의 조감독 출신이라는 사람이 이끌던 곳이었는데 단체 이름이 " 16mm 카메라를 든 사나이 "던가 뭐라고 한 것 같은데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 사람은 이미지가 어두웠고 뭔가 침울해서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아무튼 분위기가 "문화공간서울"하고는 정반대의 진지한 영화 클럽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16밀리 필름 제작 워크숍에 참여했다. 우리는 한 편의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 각자가 제출한 시나리오 중에서 서울대 철학과 1학년에 다니던 아이의 시나리

11분 분량
우중산행(雨中山行)

우중산행(雨中山行)

추억이라는 것은 오래 전의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는 것, 또는 그 생각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메모리(memories나 recollections)라 할 수 있습니다. 추억은 돌이켜 생각해 볼만한 사건들이겠지요. 옛 일이지만 생각하면서 즐겁게 회상에 잠길 수 있는 기억이 바로 좋은 추억이죠. 따라서 좋은 추억거리가 많으면 많을수록 인생을 나름대로 풍성하게 살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돌이켜 볼만한 추억이 별로 없다면 그것처럼 허무한 인생도 없을 것입니다. 매우 은밀하고 사적이고 볼 품 없는 것이라도 자신에게 소중한 추억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라면 당사자에게 그것은 충분히 음미할 가치 있는 추억이지요.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바로 발자취입니다. 다만, 어떤 이는 타인과 공유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매우 사적인 영역으로 남기는 것만 다를 뿐이죠. 우리들 대부분은 자신의 발자취를 홀로 기억하거나 때로는 그것조차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채 살고 있지요. 우리의 인생은

25분 분량
2017년 한 해를 보내며

2017년 한 해를 보내며

2017년 1월 4일, 아들이 새로 다닐 Colegio Bilingüe Atlantic School의 유니폼을 백화점에서 입어 보고 있다. 올 한 해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특별히 기념할 만 하다. 새 해가 시작되자마자 미국을 떠나서 아들과 함께 스페인에서 새롭게 시작했다. 1월 3일이었다. 나는 집을 떠나서 도착할 때까지의 생각을 휴대폰으로 간간히 적었던 스페인 행 이라는 글을 지금까지 비공개로 해 두고 있었다. 그러므로 2016년 말은 어느 정도 부산했을지는 대략 짐작이 갈 것이다. 고등학생인 아들을 6개월 이상을 다른 나라에 데리고 가기까지 틀림없이 큰 결정이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 2016년 11월 23일 자로 아들은 다니던 RHS를 그만두었다. 물론, 나의 결정이었다. 그때가 10학년이었으며 두 달 좀 넘은 시점으로 1학기 성적조차 나오지 않은 시점으로 아무런 레코드도 없는 상황에서 학교를 그만 두게 했다. 물론, 그만한 사정이 있었으며 나는 단 하루 만에 결단을 내

21분 분량
추억은 방울처럼

추억은 방울처럼

동네 극장을 바라보며 조금 전에 아들을 데리러 10년을 넘게 살았던 륏지우드(Ridgewood) 다운타운에 있는 극장에 갔다. 그 극장까지는 우리 집에서 13 마일 가량 떨어져 있는데 교통이 원활할 때에는 25분 정도 걸리며 교통량이 증가하는 시간대에는 30~35분 정도 소요된다. 나는 밤 10시 34분 경에 도착해서 아들이 극장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932년에 세워진 이 극장은 4개의 스크린을 운영하고 있다. 아들은 이 도시에서 4살부터 죽 자랐으므로 친구들이 이 타운에 다 있다. 오늘은 그 중 가장 친하게 지내고 있는 아이를 포함해서 몇 명이 스타워즈를 보고 있었다. 우리 식구들은 2005년부터 이 극장에서 얼마나 시간을 보냈을까? 영화를 보는 것 외에도 딸의 열 두 살 생일 파티를 위해 이 극장을 빌린 적이 있었다. 딸 아이는 미국에 온 이후에는 자신의 생일에 친구를 초대해 본 적이 없었다. 우리 식구끼리 집에서 생일 파티를 열어줬었다. 물론, 아이가 원한 것이었

31분 분량

Proposal to my family in 2005

2005년 6월 29일, 막내 동생의 집에서 한국에 있는 나의 가족에게 영상 편지를 만들어서 보냈다. 미국에 와서 가족이 살만한 곳을 알아 보기 위해서 나는 거의 한 달 가량을 동생 집에 머물렀다. 물론, 당시에 막내 동생이 나 대신에 미국에 있는 회사 일을 대신 처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도 살펴 볼 겸 여러 가지 목적으로 왔다. 그러나 아내와 나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그곳에 이미 회사가 있었으며, 내가 직접 담당해야 했기 떄문이었다. 동생은 자신의 본업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따라서 내가 그 당시에 미국에 온 것은 어디에 정착할지 등을 살펴 보기 위함이었다. 나는 틈이 나면 동생과 함께 그가 추천하는 버겐카운티의 몇 군데 타운을 돌아 다녔다. 그가 시간이 나지 않을 때에는 동생이 아는 사람과 함께 몇 차례 돌아보기도 했다. 아내가 바다를 좋아하므로 바다를 낀 에디슨이라는 뉴저지 중부까지도 갔다. 그러나 북부지역인 버겐카운티의 몇 마을이 마음에 들었다.

5분 분량
1995년 그해 여름

1995년 그해 여름

1995년 여름. 도원 저수지 계곡으로 물놀이를 갔다. 어머니도 건강하게 생존해 계실 때였으며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나실 줄은 꿈에도 몰랐다. 큰 형님네도 단란한 생활을 할 때였데 이들 부부가 헤어져 살게 될 줄은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큰 형수님으로부터 두어 발 떨어져 있는 아이가 둘째 형님의 딸인 나연이다. 그리고 형수님 뒷편에 보이는 사내 아이가 나연이 남동생, 그 옆이 큰 형님의 딸, 미라 같다. 나의 고향은 동해 바다와 태백산맥을 양쪽에 둔, 강원도 고성군인데 위의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고성군의 많은 부분이 북한에 속해 있다. 그중에서도 한반도에서 가장 절경이라는 금강산이 북한 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만일에 금강산이 남한에 속했다면, 고성군 지역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빼어난 바다와 인근의 설악산 때문에 한국의 최고 관광지 중의 하나지만, 금강산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다. 도원저수지는 인근에서는 꽤나 큰 저수지다. 이곳은 도원

18분 분량
추억을 스캔하다 - The Hahm Family

추억을 스캔하다 - The Hahm Family

이 글을 "추억을 스캔하다 - The Hahm Family"로 단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나의 앞선 연작 글, "추억을 스캔하다" 시리즈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 바와 같이 올 8월초부터 틈틈히 나는 20-30년 된 35미리 네거티브 필름들을 스캐너를 이용해서 디지털로 변환 작업을 하고 있다. 한 번에 적게는 서너 장, 많게는 10장씩 스캔하는데 걸리는 작업 시간이 30-40분 정도 걸린다. 작업이 끝나면 컴퓨터에 저장된 사진들을 한 번씩 보게 된다. 그 때마다 그 순간들이 떠 오른다. 인화된 필름에는 촬영 날짜 등의 기록이 없기 때문에 디지털 변환 순서는 그야말로 램덤이다. 따라서 연도 등이 뒤섞여서 작업이 된다. 그런 와중에 자주 보게 되는 사람들 중에 영훈이네 가족이 있다. 함영훈과 그의 동생 함영준, 그리고 이 두 동생들의 부모님이신 함수곤 선생님과 박현자 선생님이시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을 이렇게 지은 이유이다. 영훈이는 내가 서른 둘(한국 나이)일 때 나의 아내인 서유

17분 분량

시간과 인생

"나의 꿈 중의 하나는 60 세에 테니스 윔블던 시니어 대회에 나가는 것, 그리고 80 세에 멋진 연애를 해보는 것 이런 것도 있다. 내가 철이 없다고? 니들은 송장이다." 비영리 사단법인 21세기 프론티어에서 나와 같이 활동을 했던 고 양신규가 쓴 "The Co-Evolution of Technicians and Age (October 31, 1998)"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는 사십대 중반에 죽었으므로 그의 꿈은 끝내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MIT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쳤다. 그 후에 뉴욕대 경영대학원(NYU Stern School of Business)의 교수로 지내면서 MIT에 초빙교수로 활동하였다. 그는 2005년 7월 어느 날 보스턴의 그의 셋집에서 자살했다. 그와 이혼한 그의 전 아내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정보는 없다. 다만 그가 죽었을 때 그는 보스톤의 한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있었다. 그와 나는 21세기 프론티어의 회원으로 10년 넘게 활동을 같

10분 분량
추억을 스캔하다 - 홍석일

추억을 스캔하다 - 홍석일

1995년에 만난 홍석일은 영화배우 이경영 씨와 똑 닮았다. 선한 눈매, 웃는 모습도 그렇다. 그런 그가 그 이듬해인가 미국 여행 중에 사망했다는 비보를 접했다. 위의 사진에서 모자를 쓴 사람이 홍석일 씨다. 그리고 왼쪽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그 소식을 들었지만, 우리는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충격을 입었다. 내가 창설한 21세기영상캠프는 영화진흥공사, 동숭아트센터, 세종문화회관, 투니버스방송국에서 각각 진행했던 한국에서는 최초, 최대 규모의 영상 캠프였다. 어린이들은 영상감상비평, 애니메이션 창작, 비디오 영상 제작 등의 캠프를 통해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비판적인 시각을 갖출 수 있었다. 이 캠프는 해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진행이 되었으며 각 종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내가 홍석일 씨를 생각할 때마다 떠 오르는 사람이 바로 배우 이경영씨다. 나는 이경영 씨를 좋아한다. 그는 내가 진행했던 21세기영상캠프에 무료로 참가해서 강연도 해 주는 등 개인적인 인연도 있지만 오래 전에 고인이

18분 분량
추억을 스캔하다 - 밀로스 스케힐크

추억을 스캔하다 - 밀로스 스케힐크

현상된 35mm 필름을 스캔하면서 순식간에 25년전, 30년전의 어느 순간의 생생한 장면과 마주치는 경험은 일상에서는 잘 느끼지 못하는 경이롭기만 한 일이다. 만일 내가 사진첩을 뒤적였다면 이런 느낌은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진첩에 담기지 못한 채 현상 비닐에 수십년째 갇혀 있다가 갑자기 모니터 화면에 생생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는 것, 그리고 그것이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던 것이라면 우선 놀라움이 앞선다. "아, 이런 일도 있었구나!" 그러나 그 순간에 나는 얼마나 충만한 삶의 한 가운데 서 있었을까? 1995년, 유니세프와 공동으로 주최한 제1회 서울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를 열면서 공식 초청 손님으로 시카고국제어린이영화제 창설자인 밀로스 스테힐크(Milos Stehilk) 씨를 초대하였다. 그는 심포지엄에도 참여해서 청소년영상물의 보급 등에 관한 발표자로도 참여했다. 위의 사진은 송파구청에서 열린 영화제에 아이들이 영화 관람을 하기 직전의 생기발랄한 모습이다.

8분 분량
추억을 스캔하다 - 들풀모임

추억을 스캔하다 - 들풀모임

2017년 8월 14일 이른 오후다. 나는 며칠 째, 그러니까 지난 8월 6일부터 추억을 스캔하고 있는 중이다. 얼마전 캐논 9000F Mark II이라는 모델을 하나 장만해 놓고 본격적으로 내가 보관하고 있던 인화된 35미리 필름들을 스캔해서 디지털 파일로 만드는 작업이다. 4800 dpi로 만들고 있는데 9600 dpi까지 화질을 높일 수는 있지만, 이미지 파일 한 개의 사이즈가 34 메가 바이트를 넘기 때문에 대신에 그것의 1/3 수준인 4800 dpi로 작업 중이다. 현상된 필름을 두 개의 릴에 삽입하고 초기 스캔을 하면 촬영 된 이미지들을 자동 지정을 해 준다. 파일 이미지는 9~13 메가 바이트 정도로 만들어진다. 10장의 이미지 파일로 전환하는데 약 40분 정도가 소요된다. 먼지나 스크래치, 필름에 변색이 생긴 것도 어느 정도 자동으로 조정을 해 주기 때문에 좋다. 한 번 스캔 명령을 내리고는 주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옆에서 내 할 일을 하고 있다가 스캔이 끝난 것을

33분 분량
손 편지

손 편지

나는 어제, 거의 35년 만에 내 개인 편지들을 꺼내 보았다. 그리고 예상치도 못한 발견도 했다. 특히 허인하라는 사람이 발송한 편지를 발견한 것은 나에게 아주 큰 감동을 주었다. 그래서 그 편지를 스캔하고 그것에 관해 허인하 from Queen 라는 제목으로 쓴 글이 도화선이 되어서 내립다 여러 편의 글을 쓰게 되었다. 나와 객지에서 동고동락을 한 친구의 편지들은 겨울나무 와 비처럼 바람처럼, 정순일 의 두 편을 글로 엮었다. 그리고 나의 바로 위의 형이 보낸 아픈 편지들을 갖고 글을 하나 썼는데 그 제목은 십년동무 대식이 형의 편지 이며 비공개로 해 놨다. 그리고 누가 보낸 편지인지를 알 수 없는 것들만 묶어서 발신 미상의 편지들 로 썼다. 그리고 내가 열 일곱부터 해외 펜팔을 한 편지도 몇 통 발견되어서 그것으로 Pen Pal 이라는 글을 썼다. 이 편지들은 거의가 내가 고향집에서 방위 근무를 할 때에 받은 편지들이다. 그 무렵에 위문 편지를 받아 인연이 된 한 여학생과의 이야

14분 분량
위문 편지

위문 편지

우리 마을에 강원도 최전선 동부 지역을 담당하고 있는 22사단 본부가 있다. 어렸을 때에는 태백산맨 자락에 몇 개의 지하 벙커가 있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을 때였는데 그곳에는 전구도 있었고 전구가 없는 소켓에 손을 넣었다가 깜짝 놀라기도 했다. 엄청난 볼트의 전류가 흘렀기 때문이다. 공사를 한지 얼마되지 않은 벙커는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 앞에 넓게 닦아 놓은 운동장에서 야구 놀이를 하며 놀기도 했다. 물론, 여름 방학 때였다. 우리는 동네의 모든 소들을 한꺼번에 모아서 점심을 마친 오후 1시 좀 넘어서 태백산맥 자락의 골짜기로 소들을 몰고 가서 넣어 뒀다. 그리곤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놀았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대규모의 공병부대원들이 투입되더니 대규모 공사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그때부터 그 통제된 구역을 제대로 다니지 못하게 되었다. 그곳에 마침내 22사단 본부가 들어섰다. 나는 3주간의 짧은 군사훈련을 마치고 22사단본부의 공병대대 본부에 배치되었다. 행정반에 배친

11분 분량
My Pen Pal Friend

My Pen Pal Friend

나는 중학교를 1979년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여름에 서울에서 공장에 취업해 일을 하다가 추석 때 집에 내려 왔다가 그길로 1981년 1월까지 충북 제천의 고암동에 살았다. 그곳은 충북에서 가장 큰 연탄공장들이 밀집해 있던 장락3거리 근처였다. 아마도 5개 정도의 공장이 한 블럭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중에 나의 외삼촌이 경영하는 회사가 삼화연탄이었다. 나의 큰 형 Hun은 고향에서 의무병역을 마친 후 그 회사에 취직했다. 그 후에 결혼을 한 Hun은 적은 급여 대신에 자영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회사로부터 공장 판매 가격으로 연탄을 구입해서 소매 시장에 팔아 중간 마진을 취하는 방식이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트럭이 필요했다. 그는 월 할부로 기아자동차의 2.5톤의 타이탄 트럭을 구입했다. 그는 자신을 도울 사람으로 나를 선택했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에서 한 공장에 취업해서 고등학교졸업자격검정고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나는 그에게 단지 비생산적인 일을 하는

35분 분량
허인하 from the Queen

허인하 from the Queen

불려지고 싶은 것들 우리가 살면서 부르고 싶은 것들, 불려지고 싶은 것들 몇 개 쯤은 다들 갖고 있지 않을까? 어제 (2017년 6월 17일) 저녁에 나는 나의 딸과 함께 근처에서 장을 보고 와서 이곳으로 이사 온 후 처음으로 저녁을 만들어 먹었다. 식사를 하면서 나의 딸하고 이름에 대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아빠는 자신이 세운 마을이나 나라에 이름을 짓는다면 뭐라고 하고 싶어?" "그레이트 썸머. 위대한 여름." 난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나는 보통 어떤 대답을 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는 신중파인데 이 대답은 쉽게 나의 입에서 나왔다. 나의 딸은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기에 가만히 웃었다. 그녀는 내가 써 온 이름들과 그 역사를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할아버지는 봄에 태어난 아빠 이름에 여름을 의미하는 '하'를 붙이셨나?" 그렇다. 나는 봄에 태어났다. 음력으로 2월 25일이고 양력으로 3월 20일이다. 그러므로 진짜 봄이 막 시작할 때에 태어났다.

26분 분량
아버지

아버지

내가 어렸을 때에 나의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복잡하게 뒤섞여 있다. 내가 아버지 등에 업혀서 가던 그 따스하고 듬직하던 때가 지금도 기억난다. 내가 우리 형제들의 막내였을 때에 아버지는 나를 등에 업고 뒷골(윗마을)로 가시면서 노래를 흥얼거리셨다. 그때 아버지는 마흔 무렵이셨을 것이다. 내가 두어살 되었을 때니까. 아버지 등에 업혀서 지금의 22사단장 관사가 있는 언덕을 지나면서 뒷골의 첫번째 집인 송정기 형(내 큰 형의 친구)네 집이 나타나던 것을 기억한다. 아버지는 유머가 많으셨다. 그게 그 당시에는 잘 통하지 않는 것이었을지라도 지금 생각해 보면 기본적으로 매우 따뜻한 분이셨다. 사소한 것에서도 웃으셨다. 술자리에서 아버지는 말도 많으셨고 재치 있게 좌중을 재미있게 하셨다. 어린 우리에게 조크도 심심찮게 하셨다.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가부장적이셨다. 집에서 식사를 할 때마다 우리는 밭이나 바깥에 나가 계신 아버지를 모시러 가야 했는데 항상 극존칭을 해 드렸다. "아버님, 진지

8분 분량
어머니

어머니

나는 한 때 스스로 소설가가 되려고 마음 먹은 적이 있다. 그리고 나의 소설 속 주인공은 당연히 나의 어머니가 되셔야 했다. 그것이 내가 바로 소설을 쓰려는 단 하나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설픈 솜씨로 감히 나의 어머니의 생애를 그리는 것은 다시금 불효를 하는 것이기에 언감생심이었다. 그래서 나는 2012년 초인가 2011년 말인가 서울에 사는 여성 시인을 한 명 고용했었다. 매달 300만원씩 지원을 하고 나의 어머니에 대한 기초 자료를 수집하게 했다. 어머니 생전에 주변에 계셨던 분들을 인터뷰하고 자료를 정리하는 것이 목표였다. 6개월 정도 시간이 흘렀는데, 내가 그 사람으로부터 전달 받은 자료는 거의 없다시피했다. 그래서 그 시도도 그만두었다. 그렇다고 내가 특별히 나서서 자료를 수집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그래서 나의 어머니에 대한 자료는 우리 7남매의 기억 속에 각각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유일한 것이 되었다. 나는 소설이라는 형식 대신에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라는

16분 분량
내가 가장 만나고 싶은 나의 선생님

내가 가장 만나고 싶은 나의 선생님

November 25, 2015 by Wusuk Kang 아침에 일어나서 어젯밤에 가입한 우리 밴드에서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이름을 발견했다. 김갑순. 내가 중학교 생활 중에 가장 미안한 마음이 늘 가슴에 남아 있는 친구이기도 했다. 이미 우리 곁을 떠났지만 유재석이와 서울에서 자주 만났던 시절에도 이 친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미안함과 아쉬움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성진(혹은 준)이라는 친구와 김갑순은 서로 가까웠던 사이로 내가 기억한다. 아마도 두 사람은 같은 초등학교 출신이었을 것 같다. 나도 처음에는 이 두 친구하고는 잘 지냈는데 어느 날 교실에서 논쟁을 벌인 이후 서먹해 졌다. 그날의 논쟁은 종교적 신념의 문제 때문에 벌어졌는데 그 어린 나이에 우리는 그 문제로 티격태격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종교를 두고 벌인 첫 논쟁이기도 했다. 이름하여 신의 존재 유무에 관한 근원적인 문제로 얼굴을 붉힌 것이다. 논쟁이 격해지면서 나는 이 다음에 내가 할 일은

17분 분량
스페인에서 한 챕터를 넘기다

스페인에서 한 챕터를 넘기다

오늘 지난 6개월간 다니던 아들의 학교가 드디어 방학에 들어갔다. 교장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 격인 스페인어 선생님과 마지막날 다정하게 포즈를 잡았다. 방학 하루 전인 어제는 학교 파티가 열렸다. 운동장에서 학년마다 준비한 댄스를 선보이고 즐겁게 먹고 마시면서 보냈다고 한다. 내 아내는 나를 대신해서 열심히 기록을 했다면서 내가 만일 현장에 있었다면 체면 불구하고 기록을 충실하게 할 했을 것이 때문이다. 덕분에 현장의 느낌을 사진 몇장을 통해서 충분히 전달 받을 수 있었다. [wpvideo krC9jGJU] 어느 학년에서는 아주 오래 전에 유행했던 "강남스타일"로 춤을 췄다고 한다. 이제 스페인에서 6개월을 살면서 내 아들은 열 다섯에서 열 여섯이 되었다. 나이 만큼이나 생각하는 것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불편한 다른 나라에 가서 부대끼면서 산다는 것은 어린 아이들에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같다. 늘 21도 정도를 유지하는 살기 좋은 까나리섬은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다. 그리

17분 분량
불려지고 싶은 것들

불려지고 싶은 것들

어제 우리 딸은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부엌 정리를 다 마쳤다. 그리고는 나를 불러서 H-Mart에 가서 장을 좀 보자고 했다. 주방이 정리되었으니 이제 집에서 밥을 해 먹을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사한 날부터 줄곧 주문 배달을 해서 먹었다. 이곳은 주변에 한인 밀집 지역하고 가까운 타운이라서 그런지 배달을 해 주는 업체들이 많았다. 내 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Fort Lee의 붐붐 치킨에서도 배달을 할 수 있다는 게 꿈 같은 이야기다. H-Mart는 그냥 한국 수퍼마켓이라고 보면 된다. 아시안들도 이 마켓에서 필요한 재료를 많이 산다. 오늘은 라면을 파는 섹션에서 50대 초반의 한 백인 사내가 수 많은 이름모를 라면 브랜드 앞에서 우물쭈물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나도 모르는 브랜드 천지다. 왠 라면 브랜드가 이리 많은고!). 자기로서는 어떤 게 어떤 것인지 알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하는 것이다. "짜슥들. 우리는 허구헌날 느끼는 황당함

38분 분량
A Sleeping Fox

A Sleeping Fox

[vimeo 220360736 w=640 h=360] I have a fox in my backyard from Woody Kang on Vimeo . 뒷마당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여우. 동영상을 보면, 여우한테 뒷마당을 빼앗긴 다람쥐가 지붕으로 도망가서 짹짹거리며 울고 있다. 다음 주에는 다른 마을로 이사를 가기 때문에 수영장은 오픈하지 않고 그대로 덮어 놓아서 무슨 방치된 늪처럼 보인다. 간혹 저곳에 야생 오리 한 쌍이 찾아와서 몇 시간 놀다 가는 놀이터가 되었다. 여우야, 여우야, 어딨니 오늘 아침에 부엌 창문 밖에서 슥~ 지나가는 여우를 발견하고 폰을 가지러 간 사이에 없어져서 아쉬워 했다. 내 인생에서 동물원에서 여우를 본 것 빼고는 직접 눈 앞에서 그 녀석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작년엔가 우리집 근처에서 스~슥~ 지나가는 것을 본 적은 있지만, 정확하지가 않아서 긴가민가했었다. '이런 인가에 왠 여우?'하고 말이다. 그러나 오늘은 확실하게 증거를 잡았다.

11분 분량
스타워즈와 넬슨신

스타워즈와 넬슨신

2015년 12월 18일 자정 무렵에 쓴 나의 짧은 아래 글을 보니 다시 그때가 생각 났다. 10년 만에 세상에 다시 나온 스타워스 스핀업 시리즈 Episode VII – The Force Awakens 의 프리미어 상영을 보기 위해 그 날 밤에 가든 스테이스의 AMC 극장에서 나온 뒤, 집에서 짧게 쓴 이야기였다. 그 글에서 나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자세하게 적겠다는 부분이 있어서 오늘은 그것과 관련하여 글을 쓰고자 한다. 어떤 사람과 관련이 된 것인데 그는 바로 넬슨신 (Nelson Shin)이라는 분이다. 이분은 1939년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을 하는 한국이 낳은 뛰어난 애니메이터이자 비즈니스맨이다. 그는 전세계 애니메이션영화 업계를 대표하는 국제 단체인 세계애니메이션영화협의회인 ASIFA 의 회장을 맡고 있다. 나는 이분과는 1997년 여름에 내가 서울에서 국제영화제를 진행하던 기간 중 (혹은 영화제가 끝난 후)에 알게 되었다. 아래부터는 편의상 이 분에

22분 분량
The Dinner at ABC Kitchen

The Dinner at ABC Kitchen

[2015년 12월 23일 by Woody Kang] 우리 식구는 뉴욕 맨해튼의 ABC KITCHEN 에서 저녁 시간을 가졌다. 그러니까 내 아내이자 두 아이들이 엄마인 서여사의 생일날이었다. 연말의 분위기 때문에 서여사는 생일이면 외식을 예외없이 하는 복을 받았다. ABC Kitchen은 ABC Home과 연결되어 있어서 식당 예약 시간이 남으면 그곳에 들려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지상 1층과 지하 1층에 있는 ABC Home의 인테리어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기분 전환이 충분하다. 내 딸이 고등학교 다닐 때에 이곳에서 식구들끼리 점심을 하자고 제안해서 이미 한 번 간 적이 있었다. 내가 주차를 하고 늦게 도착하니 유명한 남자 배우가 옆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며 식구들이 다소 들떠 있었다. 그만큼 뉴욕에서 연예인들도 자주 출몰하는 식당으로 알려져 있다. 딸 아이가 자기 엄마의 생일 선물로 주기 위해 시간이 나는대로 틈틈히 그린 그림이다. 코넬에서 첫해를 보내면서 눈

6분 분량
창문 너머 어렴풋이

창문 너머 어렴풋이

내가 고향의 부모님 품을 떠나서 서울로 간 것은 1979년 여름이었다. 강릉고등학교 입학에 실패한 뒤, 재수를 할 생각 대신에 어느 날 화장실에서 휴지로 사용하던 어느 주간 잡지에 난 검정고시 광고를 본 뒤에 홀로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검정고시 교과서를 판매하는 광고였다. 1년만 준비하면 굳이 3년 동안 고등학교를 다니지 않고도 졸업을 할 수 있다는 광고에 현혹이 되었다. 그래서 강의록을 주문해서 집에서 공부를 했다. 농사꾼의 아들로서 낮에는 농사일을 했다. 아직 본격적인 농사가 시작되기 전인 춘삼월에는 형들과 함께 사방공사를 다녔다. 6.25 전쟁으로 우리나라 대부분의 산림들은 모두 사라졌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나마 남아 있던 숲들도 뗄감용이나 숯불, 목재용 등으로 무분별하게 사용되면서 전국의 산들은 그야말로 헐벗은 민둥산으로 변했다. 척박한 민생의 삶과 맞닿아 그렇게 산마다 나무란 나무는 모두 사라졌으므로 폭우가 쏟아지면 산사태가 나곤했다. 제1, 2공화국에서는 제대로 실효적

17분 분량
토너먼트에 다시 서다

토너먼트에 다시 서다

2017년 5월 5일 저녁이다. 한국에서는 이 날만 어린이 날이지만, 이곳 미국은 365일이 어린이 날이라는 말이 있다. 아이들이 제일 상전이고 그 다음이 여자들, 그 다음이 강아지들이며 마지막이 불쌍한 남자들, 특히 앞의 상전들을 다 모셔야 하는 아버지요, 남편이요, 강아지 주인인 남자들이다. 나는 그래도 세번째는 간다, 강아지가 없으므로. 지금 뉴욕 맨하튼에서 열리고 있는 스쿼시 토너먼트에 나와 있다. 나는 몇 년 전에 이 대회에 출전한 바가 있다. 그때는 별로 좋은 기억은 없었다. 이번에는 좋은 추억을 만들어야 할 이유가 있다. 내가 속한 그룹은 맨해튼 44번가와 벤더빌트 에비뉴에 있는 예일클럽에서 열리고 있다. 위의 첫번째 건물 전체가 뉴욕시 예일동문들이 이용하는 곳이다. 이처럼 뉴욕시에는 주요 아이비리그 대학 동문들의 자체 건물들이 있다. 뉴욕시 맨해튼에 있는 예일, 하버드, 프린스턴, 코넬 클럽들(위에서부터). 7시 30분에 시작할 내 순서는 앞 경기들의 지연으로 현재 7

17분 분량
잊지 못하는 그때 그곳 그맛!

잊지 못하는 그때 그곳 그맛!

[wpvideo JqW64gjb] 2004년 11월 20일, 강원도 어느 동해 바다이다. 우리 가족은 명진이의 고양자유학교 친구인 채현이를 데리고 고향에 내려갔다. 옷차림으로보면 제법 쌀쌀한 날씨 갔다. 고향에서 당시 아버지를 모시고 계시던 누님의 안내를 받아 한 어촌에 갔다. 그곳에서 막 잡아 들어 온 양미리 등을 사왔다. 오는 길에 바닷가에서 나의 누님 해정 스님은 영욱이를 데리고 즐겁게 노셨다. 그 추운 날에 바다에 풍덩하기도 하고. 저렇게 즐거웠던 한 때를 아이는 기억하지 못할 것 같다. 너무 일찍 한국을 떠났으므로. 그러나 나의 아들이 지금까지 잊지 못하는 장면, 맛, 분위기가 하나 있다. 할아버지 집에서 마당에 석쇠를 걸어 놓고 구워 먹던 그 맛을! 한 번은 아이가 2009년인가 한국을 갔을 때 아이 작은 고모가 고기를 구워졌다는데 먹어보던 아이가 "이 맛이 아이야!" 하더란다. 이번 봄에 한국에 갔을 때도 아이는 그때의 그 고기를 찾았다. 이 녀석아. 그 맛은 이제 두

12분 분량
철영, 지원 부부

철영, 지원 부부

이 부부는 2000년에 결혼을 했다. 내가 이들의 주례를 섰다. 첫 주례였다. 선릉역 근처에서 벤처기업의 대표로 있을 때였다. 하루는 철영씨가 여자 친구 지원씨를 데리고 회사로 찾아왔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내가 이 커플의 결혼식 사회를 봐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런데 사회가 아니라 주례를 봐 달라는 것이었다. 자기들하고 나이 차도 몇 살 나지 않는데 무슨 주례냐 싶어서 그 이유를 물어봤다. 우리 부부가 롤 모델이라고 했다. 꼼짝 없는 답변에 엮였다. 그래서 얼겹결에 만 서른 여섯에 주례를 서게 되었다. 철영 씨는 내가 국제영화제를 진행할 때에 자막 번역 자원봉사자로 참여를 했었다. 그때가 1998년이었을 것이다. 광화문 사무국에 자주 들락거리면서 좋은 인연을 가졌다. 당시에 자막 번역 자원봉사를 한 친구들 중에는 너무 보고 싶은 친구들이 아주 많다. 다들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을거다. 철영씨는 현대상선에 입사지원을 할 때 우리 영화제에서 자원봉사를 한 경력 증명서를 떼

5분 분량
반포 아파트 방문

반포 아파트 방문

내 처제의 친구 부모님이 사시던 구반포를 아이들을 데리고 방문한 적이 있다. 2004년 2월 10일이었다. 아내는 이 분들과 구면이었을지 모르지만, 나와 나의 아이들은 처음 뵙는 분들이었다. 그렇지만, 사진에서 느껴지듯이 마치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같은 케미가 느껴진다. 사진으로만 보면 나의 아이들이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 같다. 이 분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사시는지 궁금하다. 이 댁의 따님은 당시에 브라질에 사는 것으로 기억나는데.

5분 분량
두언이와 함께 한 영욱이의 4번째 생일

두언이와 함께 한 영욱이의 4번째 생일

2005년 6월 11일, 영욱이의 4번째 생일 날이다. 당시에 그것이 한국에서 마지막 맞이하는 아들의 생일일 줄은 몰랐다. 나는 얼마 후 미국으로 떠났으며 한달 가량 머물다가 7월에 돌아왔다. 그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결정을 했다. 생일 다음 날인 6월 12일, 두언이네 식구가 우리 집을 방문했다. 사진을 보면 두 아이가 쇼파 위에서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있어도 공간이 넉넉할 정도로 당시의 아이들은 그야말로 꼬맹이들이었다. 저 아이들은 그해 9월에 우리가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에 한번 더 만났다. 그리고 그 뒤로 한국에 올 때마다 만나곤 했지만, 이번 봄에 만났을 때는 정말 다 큰 녀석들이었다. 두언이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미국 학제로는 벌써 Junior인 셈이다. 세월은 흐르고 그에 맞게 자연의 일부인 우리들도 아름답게 변해 간다.

5분 분량
운봉산에 오르다

운봉산에 오르다

운봉산 雲峰山에 올랐다. 어렸을 때에 몇 번 오른 적이 있었는데 Max를 데리고는 처음이다. 물론 아이도 처음이다. 고향집 뒤에서 운봉산으로 올라가던 길은 아예 없어져서 집 뒤의 서둑돌 (위의 사진에서 검은 돌무더기를 그렇게 불렀다)을 따라서 올라갔다. 그러니까 무모하게도 산 정면을 돌파한 것이다. 운봉산은 해저에서 뜬금없이 솟아난 산이라서 주변의 지질이나 형태와는 완전히 다르다. 돌무더기는 오각~팔각형의 돌기둥들이 오랜 세월을 거쳐서 무너져 내려서 생긴 돌 바다이다. 따라서 정상 부근에는 지금도 여전히 돌기둥들이 수백미터 서 있는 형태이다. 정상 부근에는 다행히도 등산용 밧줄을 미리 묶어 둔 곳이 나타났다. 그래서 어렵지 않게 산을 오를 수 있었다. 그렇지만 평상복 차림이어서 쉽지는 않았다. 정상에 오른 후 왔던 길을 다시 내려 가기엔 너무 위험하고 쉽지 않을 것 같아 뒷골에서 정상까지 연결된 하이킹 길을 이용해서 내려 갔다. 22사단 관사 근처에 도착해서 큰 형님께 전화를 해 데

14분 분량
스페인에서 살아보기

스페인에서 살아보기

토요일인 어제 오후 4시에 우리 집 목욕실에 샤워 커튼 설치를 위해 사람들이 방문할 일이 있어서 그 전에 아들과 함께 외출을 했다. 아들이 낮에 김치찌개를 해서 집에 배인 냄새도 뺄겸 집안 청소를 해 놓았다. 이 집은 창문 몇 개만 열어 놓으면 환기가 참 잘 되서 좋다. 우리는 약 58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남쪽 도시, 마스팔로마스(Maspalomas)로 갔다. 특별한 계획은 없었으며 그 근처에 있는 쁠라야 델 잉글레스(Playa del Ingles) 타운에 있는 동남아시아 퓨전 레스토랑에서 저녁이나 한끼 하는 것이 주된 목표였다. 이미 시간은 오후 5시 정도였다. 내키면 밤 늦게 열리는 카니발에 참여할 생각 정도는 있었다. 이 곳에서 국제카니발축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도착해서 무엇을 할까 궁리를 하다가 축제 일정을 확인해 보니 다음주부터 시작된다. 이 레스토랑은 트립어드바이저 기준으로 이 지역의 319개 레스토랑 중 10위로 평가 받는 곳인데 우리는 아시안 음식을 먹고 싶었기 때문

17분 분량
나의 청소년 시절 옴니버스

나의 청소년 시절 옴니버스

의식주 생명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음식과 안식처가 필수 요소이다. 아무리 사나운 맹수라도 편안하게 잠잘 곳은 필요하다. 만일 자연 환경이 그 맹수에게 완벽해서 별도로 정해진 안식처가 필요 없다면 자신이 지배하고 있는 영토가 바로 자신의 안식처가 된다. 그렇지만 적이 없을 것 같은 맹수도 자신의 관할 영토를 벗어나 인간에게 노출되거나 경쟁자에게 노출이 되면 생명을 보장할 수 없거나 불안에 떨게 마련이다. 하물며 먹이사슬 중 하층에 있거나 중간계층에 있는 생명체라면 자신과 종족을 보호하기 위한 안식처는 너무나 중요하게 된다. 깊은 곳에 땅을 파서 집을 마련하거나 깍아 지를듯한 계곡에 안식처를 마련하기도 한다. 예로부터 인간에게는 의식주(의식주) 즉, 입을 것 먹을 것 잠잘 곳이 필수 요소로 여겨져 왔다. 인간은 애초에 태생한 곳을 벗어나 지구의 모든 대륙으로 이동하면서 변화된 날씨에 적응하는 수단으로 다른 생명체와는 달리 옷이라는 것을 발전시켜 왔다. 그럼으로써 극한 냉동과 발열 상태

49분 분량
청혼 이벤트

청혼 이벤트

신혼, 원룸 사무실에서 시작하다 1995년 3월에 결혼한 우리 부부의 첫 신혼 살림은 당시 서울 강남의 역삼세무서 뒤편의 한 작은 건물 2층에 있는 스튜디오였다. 내가 잠잘 침대 하나와 벽 쪽에 붙여 놓은 책상 2개가 들어가고 나면 여유 공간이 없는 작은 스튜디오였다. 그리고 그 스튜디오를 위한 별도의 보일러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한 겨울에도 더운 물이 없이 지내야 했다. 당연히 그곳에는 샤워 시설조차 없었다. 방에서 베란다 문을 열면 왼쪽 벽면에 싱크대 하나가 달랑 있어서 그곳에서 밥을 짓고 세면을 했다. 오른편에는 용변을 볼 수 있는 시설이 있었는데 별도의 칸막이도 없었다. 그러니까 1994년 12월이나 1995년 1월경에 그 원룸을 얻어서 나는 앞 일을 도모했었다. 1994년 그해에 나는 그야말로 폭삭 망한 신세였다. 그래서 새롭게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더구나 결혼을 앞두고 있었으므로 나는 과거와 완전히 손을 끊고 달라져야 했다. 사무실 얻을 보증금이 없어서 예비 신부가

35분 분량
주말 여행

주말 여행

오후 2시 30분 경에 집을 나섰다. 나는 어젯밤에 한국 드라마를 하나 발견해서 4회를 연속으로 보느라 새벽 3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9시 정도에 일어난 후 10시 경에 아이를 깨워서 아침을 간단하게 먹었다. 오늘은 이 지역의 관광에 나서기로 했다. 후보지가 몇군데 있었지만 정하지는 않았었다. 아들과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나누다가 아들이 아침에 먹은 생우유가 약간 상했는지 배가 조금 아프다고 해서 간단한 약(정로환으로 우리집에서 유일하게 아내와 아들이 배에 탈이 났을 때 복용하기 좋아하는 약이다!)을 먹인후 아이의 경과가 좋아질 때까지 각자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점심 시간이 지나서야 출발을 할 수 있었다. 우리의 목표지는 북쪽 해안을 따라서 35분 정도 드라이브를 하면 도착할 수 있는 Agaete 타운에 있는 Ragu라는 식당이다. 운전을 하기 전에 행선지를 한번 살펴보니 길이 간단해서 굳이 구글 맵을 이용할 필요가 없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이 지역의 큰 도로는 대충 파악을

11분 분량
새집에서의 첫날

새집에서의 첫날

거실은 넓지 않다. 그러나 소파 베드가 있어서 만일 손님이라도 맞이하게 된다면 2명 정도는 충분히 제공이 가능하다. 미국에서 들고 온 핸드 드립 커피 셋트로 커피를 내려 마시고 있다. 아내가 출발하기 전날 볶은 원두 커피 두 봉지를 냉동고에 저장해 두고 있다. 아직 드립 주전자를 사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유럽은 에스프레소 커피를 대게 사용하므로, 핸드 드립용 주전자는 아마존닷컴을 이용해서 주문해야 할 것 같다. 거실에서 층계를 올라 가면 내 방과 아들 방이다. 넓은 창문으로 빛이 밝게 들어 온다. 욕실과 다용도실도 잘 되어 있다. 욕실의 창문은 원래 바로 위의 사진처럼 그린색 계통이었는데 어제 새롭게 인부들이 페인트 칠을 하면서 밝은톤으로 바뀌었다. 스페인에 와서 처음 맞는 일요일(1월 8일)이다. 오늘 아침 9시 경에 일어나서 바닥 청소를 했다. 우리가 렌트한 집은 지하 2층에 지상 6층 건물이다. 각 층마다 2개의 콘도 유닛이 들어가 있는데, 우리가 있는 5층은 복층으로 구성되어

20분 분량
새

오늘(12/30/2016), 마지막으로 딸 아이의 짐을 싣고 맨해튼의 아파트로 갔다. 건물 앞의 빈공간에 임시 주차를 한 뒤에 트렁크를 열고 짐을 하차하기 시작했다. 며칠전에 SUV에 딸의 이삿짐을 가득 싣고 왔기 때문에 오늘의 주요 목적은 새 두 마리를 옮기는 것이었다. 이 녀석들이 사는 집이 제법 커서 겨우 차에 눞혀서 넣을 수 있었다. 그외에 몇 가지 물건들이 추가 되었다. 내가 짐들을 뒷칸에서 꺼내 도로에 내려 놓으면 아이들은 날랐다. 아내는 빌딩의 관리원에게 짐이 일부 도착했음을 알리기 위해 먼저 들어갔다. 우리 빌딩에는 하루 3교대의 관리인이 24시간 서비스를 한다. 그 외에도 청소 등 기타 지원 인력이 2명, 이들을 총괄하면서 입주민들의 모든 지원을 맡고 있는 수퍼가 빌딩에 상주하고 있다. 이렇게 외부에서 짐을 갖고 오면 일반 로비를 이용하지 못하고 처음부터 별도로 만들어진 화물 통로를 처음부터 이용해야 한다. 따라서 건물은 언제나 최상의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 암튼 위

8분 분량
영화제 감독 Festival Director

영화제 감독 Festival Director

위에 있는 내용은 도쿄에서 열리고 있는 키네코국제어린이영화제(KINEKO International Childern’s Film Festival)에서 참석하고 중인 Liz가 그곳에서 KINEKO 영화제를 운영하는 Sayaka를 만나 그녀와의 우정에 감사하는 내용이다. 그녀의 페이스북에 올라간 그 포스팅을 보면서 나는 예전 생각이 나서 그녀에게 댓글을 위와 같이 남겼다. 그리고 내 젊은 시절 내가 국제영화제를 창설하려고 애를 쓰던 때가 잠시 생각나 이 글을 쓴다. 그렇다. 내가 국제영화제를 만들고자 결심을 한 것은 서울 강남 지역의 방배역 근처에 있던 Kumi라는 회사에 근무할 때였다. 그 회사는 해외에서 해마다 수십만 종의 전문 분야의 전공 서적과 수만 종의 잡지를 수입해서 국내의 각종 대학교들의 도서관들과 국립 연구기관이나 기업 연구소 등에 공개 입찰이나 개별 영업을 통해서 판매하던 회사였다. 나는 그 회사의 상품관리부서의 책임자로 있었으며, 권 당 수십 불에서 수백 불에 달하는 수

21분 분량
불현듯, 그 때가 생각나다

불현듯, 그 때가 생각나다

2004년 나의 생일에 대관령 휴양림으로 휴가를 떠났다. 두살배기(2년 8개월) 아들이 짐을 끌고 언덕을 올라가는 모습이 지금보니 귀엽다. 여기에 실은 사진들은 이 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다만, 옛날의 추억을 되새김하는 나만의 방식이랄까. 오늘 나는 나의 딸과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양극성 우울증(bipolar disorder)이나 우울증(depression)과 같은 정신 장애가 사람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특히 양극성 우울증을 갖고 있으면 미국에서도 취업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제어하기 힘들만큼 기분이 좋다가 어떤 때에는 침대에서 한 걸음도 뗄 수 없을만큼 극단적으로 움추려지는 장애로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도 힘들게 한다. 그런데 그런 기제를 막기 위해 사람들이 약을 먹게 되면 양쪽(기분이 한없이 좋은 부분과 한없이 추락되는 기분)을 모두 막아 중간으로 만들기 때문에 당사자는 멍하게 된다. 너무 슬픈 일이다. 특히, 한국

33분 분량
#Memory Essay 태그 포스트 · on-public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