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n-publication

쉼표 하나를 찍다

·8분 소요

요즘은 바깥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도 없을 만큼 바쁘게 보내고 있다. 뉴스를 보지 못하고, 좋아하는 드라마나 음악도 멀어진 지 오래다. 한마디로 새벽 다섯 시 무렵에 일어나 밤 열한 시 무렵에 잠자리에 드는 일상을 한 달 보름 넘게 이어가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이후 단 하루도 쉬지 못했다. 시차 적응 같은 건 몸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둔 채, 곧바로 일에 파묻혔다.

현재 손대고 있는 프로젝트가 대여섯 개에 이른다. 마감이 임박한 것을 먼저 처리하지만, 틈틈이 다른 것도 건드리다 보니 세 대의 컴퓨터를 주변에 늘어놓고 어지럽게 오가는 형국이다. 메인 컴퓨터에 달린 두 개의 화면에선 4개 이상의 화면이 동시에 떠 있고 수 많은 작업 파일들과 브라우저가 떠 있어서 컴퓨터는 어떤 경우에는 숨이 넘어갈듯 꼴딱거린다. 다른 컴퓨터에서도 또 다른 프로젝트가 돌고 있는 가운데 또 어떤 화면에선 이미지를 만지작거린다. 정신없지만, 동시에 여러 물줄기가 합류하는 듯한 흐름 속에 나름의 리듬이 있다.

체력 유지를 위해 하루 세끼를 빠짐없이 챙겨 먹고, 간간이 책상 앞에서 운동도 한다. 내 데스크는 높이 조절이 되는 것이라 주로 서서 일한다. 덕분에 틈이 생기면 코어 근육 운동 정도는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다. 실내에서 달리기 전용 운동화를 신고 있는데, 정작 달리지는 못한다. 실내에서 신을 수 있는 운동화가 그것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몇 시간 신고 있으면 발이 불편해져서 자주 신고 벗기를 반복한다. 운동화와의 이 소소한 밀당이 하루 중 유일한 움직임의 변주다.


한편, 내 아이들은 뉴욕시로 출퇴근하며 각자의 생활 전선에서 뛰고 있다.

딸아이는 일복을 타고난 것 같다. 팀장이 프로그램을 다루지 못할 뿐 아니라 실력도 변변치 않아서, 현장과 클라이언트의 일까지 고스란히 떠안고 있다. 거기에 새로 투입된 인력이 자신과 비슷한 경력직인데도, 일일이 가르치며 함께 일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매일 집에서 정성껏 싸간 도시락을 그대로 갖고 돌아오는 날이 대부분이다. 먹을 틈조차 없는 것이다. 일복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 말에는 대견함과 안쓰러움이 반반쯤 섞여 있다.

반면 아들 녀석은 회사에서 그야말로 주가가 치솟고 있다. 1월부터 바뀐 성과 측정 기준에 따라 줄곧 최고 점수를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툭하면 보너스를 받아 온다. 1월에는 그가 속한 팀원 40여 명에게 할당된 현금 보너스 2,500달러 중 혼자서 600달러를 가져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추가로 3,000달러를 받았다고 했고, 어제는 또 700달러짜리 보너스를 보여줬다. 그리고 오늘,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던 중 승진 통보를 받았다. 기본급이 9만 달러로 뛰어올랐고, 1년 동안 받는 보너스를 합하면 꽤 높은 수준이 될 것이다. 승진 직후 CEO와 영상 통화를 하는 대화 소리가 그의 방 바깥으로 작게 흘러 나왔다. 일도 슬렁슬렁하는 것 같은데 업무 성과를 제일 잘 낸다고 하니, 머리를 갸웃하게 된다. 어쩌면 힘을 빼고 일하는 것이 진짜 실력인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에는 링크드인을 통해 미국 LG 본사와 삼성전자에서 채용 제안이 들어왔다고 전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두 회사가 바로 우리 동네 이웃에 있다는 점이다. 집에서 차로 5분이면 닿는다. 삼성전자 미국 본사가 최근 이웃 동네에 건물을 새로 세워 이사해 온 것 같은데, 가까운 곳을 두고 월스트리트까지 출퇴근하는 쪽이 더 좋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에게 이 두 회사는 최고의 꿈의 직장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자란 아이에게 그 이름의 무게는 사뭇 다르다. 아들은 한국 회사에서는 전혀 일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며 웃었다. 가장 큰 이유로 문화를 꼽았다. 특히 연장자에 대한 태도. 자기가 직장에서 가장 친하게 지내는 동료가 누나와 동갑인데, 한국 회사에서 과연 그런 관계가 가능하겠느냐는 것이었다. 나이와 직급이 촘촘하게 엮인 한국식 위계 속에서라면 아마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두 나라 사이 어딘가에 서 있는 부모의 심정이 묘하게 겹쳤다.

그렇지 않아도 아들은 하반기부터 맨해튼에서 1년간 살아보겠다며 집을 나갈 예정이다. 세계 최대 도시 뉴욕의 한복판에서 생활하는 것이 그에게는 커리어든 삶이든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다. 부모 곁을 떠나는 것이 조금은 서운하지만, 제 날개로 나는 것을 막을 이유는 없다.

누나는 모든 걸 혼자 끌어안고 버티고, 동생은 가볍게 흐름을 타며 올라간다. 두 아이의 궤적은 다르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제 몫을 해내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부모로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하루의 피로가 조금은 가벼워진다.


이런 일정 가운데서도 3월에는 두 번의 여행이 잡혀 있다.

먼저, 3월 12일부터 16일까지는 샌프란시스코를 다녀올 계획이다. 이 여행의 비행기 티켓과 호텔 비용은 아들이 낸다. 작년인가 재작년에 딸아이가 취업해서 번 돈으로 우리 부부를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으로 보내준 적이 있는데, 그것을 본삼아 자기도 부모에게 여행을 선물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정작 본인은 그곳을 이미 세 번이나 다녀왔다. 고등학생 때 여름방학에 스탠퍼드대학교 프로그램에 참가한 것이 처음이었고, 최근에도 두 차례 더 다녀왔다. 그런데도 꼭 자기 부모와 함께 그 멋진 도시를 걷고 싶다고 했다. 아쉽게도 건축회사라는 빠듯한 직장에 묶여 있는 딸아이는 함께하지 못한다.

사실 샌프란시스코는 내가 오래전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도시다. 몇 년 전 『퀀텀 스톰』이라는 SF 소설을 쓸 때, 소설 속 주요 무대 중 한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당시에는 직접 가보지 못한 채 인터넷을 뒤져가며 상상력을 발휘했다. 실제 출간된 소설에서는 많은 장면들이 삭제되었지만, 원고에는 그 도시의 더 많은 장소들을 묘사했었다. 이번 여행길에 그 장소들을 하나둘 들러볼 생각이다. 상상 속 서사와 실제가 어떻게 다른지, 혹은 어디쯤에서 닮아 있을지 — 소설가에게 이보다 흥미로운 여행이 또 있을까.

그리고 3월 27일부터는 결혼 기념을 겸해 아내와 둘이서 워싱턴 DC 쪽으로 3박 4일 편안한 여행을 다녀오려 한다. 작년이 결혼 30주년이었는데, 잔뜩 계획만 세우다 결국 어디도 가지 못했다. 처음에는 바르셀로나를 거쳐 그라나다, 세비야까지 이어지는 스페인 여행을 꿈꿨다. 우리 부부만 간다면 간단한 일이었지만, 아이들까지 데리고 가려니 서로의 스케줄을 맞추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다 중남미 코스타리카 정도로 축소했고, 그것마저 이런저런 이유로 무산되었다. 미국 서부의 그랜드캐니언도 거론되었지만, 역시 흐지부지. 계획은 크게 시작해서 점점 작아졌고, 결국 아무 데도 가지 못한 채 한 해가 지나갔다.

이번에는 욕심을 내려놓았다. DC 근처에 사는 이종국 선배도 만나고, 아내의 오랜 친구인 앤슐리도 볼 겸 그곳으로 정했다. 아들의 대학 시절, 그 근처를 자주 드나들기도 했지만, 오래 전부터 종종 다녔던 DC와 버지니아는 나름 친숙한 곳이기도 하다. 거창한 여행은 아니지만, 30년을 함께한 사람과 나란히 걷는 것이라면 어디든 충분하다.


내일은 오랜만에 식구들이 외출다운 외출을 하려 한다. 몇 년 전 뜬금없이 들렀던 뉴저지 중부의 힌두 사원을 다시 찾아가기로 했다. 이번에는 당시 함께하지 못했던 딸아이의 제안이었다. 바쁜 와중에도 가족이 함께 어딘가를 간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선물이다.

토요일인 내일, 나는 한 달 보름 만에 처음으로 하루를 쉰다. 세 대의 컴퓨터를 끄고, 운동화를 벗어두고, 마감이라는 단어를 잠시 잊을 것이다. 그리고 3월에는 아들과 함께 상상 속 도시를 걷고, 아내와 함께 30년의 무게를 가볍게 들고 나선다. 길고 빽빽했던 문장 사이에 쉼표를 몇 개 찍는 셈이다.

쉼표 몇 개면 충분하다. 그것만으로도 다음 문장을 이어갈 힘이 생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