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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근사한 건 어떤 거야

·29분 소요
사람이 근사한 건 어떤 거야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길을 택한 내 아들에게

아들의 꿈, 그리고 나의 카메라

내 아들은 꼬맹이 때부터, 정확하게 말하자면 초등학생일 때부터 영화나 드라마의 작가, 감독, 프로듀서가 되고 싶어했다.

마침 나에게는 90년대 초반부터 늘 비디오 카메라가 있었다. 1990년인가 1991년에 영화 서클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그 세계에 들어갔고, 16미리 필름 카메라로 〈피아노〉라는 단편 영화의 연출을 맡기도 했다. 그 이후에는 VHS 테이프를 넣고 촬영하는 캠코더를 사서 이것저것 찍었다. 90년대 후반, 영화학교를 운영하던 시절에는 소니의 6미리 디지털 캠코더를 장만했다. 방송용까지는 아니었지만 화질이 좋았고, 작고 단단해서 아이들과 어디를 가든 들고 다녔다.

그런 까닭에 내 아이들은 그 캠코더를 가지고 놀 기회가 많았다. 미국에 올 때도 그 카메라를 들고 왔는데, 아들은 그것으로 코흘리개 친구들과 어줍잖은 영화를 만든다며 허구한 날 돌아다녔다. 그러다 영욱이는 중학교 때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소소한 즐거움도 맛보았다. 고등학교에 가서도, 대학교에 가서도 그 꿈은 꺾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길을 가겠다는 선언

그러던 아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해, 모두에게 인정받는 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 아들은 결국 다음 달을 끝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글을 쓰겠노라고 한다. 직업을 잃는 것이 두려운 이 시대에, 그는 보이지 않는 길을 가겠다고 선언한다.

며칠 전, 아들이 내 방으로 들어올 때 나는 최근 넷플릭스에서 화제가 된 12부작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를 보고 있었다.

"이 드라마, 내가 지금까지 본 것 중 최고야. 이 드라마를 보면 네가 생각이 나. 그래서 더 몰입이 되는 것 같아." 나는 아들을 안으며 말했다.

참고로 우리는 자주 포옹을 한다. 아들이 내 가슴팍에 쏙 들어오던 때부터 안아왔지만, 지금은 내가 그의 가슴에 안기는 게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있다.

박해영의 세계 — '위로'라는 장르

이 드라마는 〈또 오해영〉, 〈나의 아저씨〉, 〈나의 해방일지〉를 쓴 박해영 작가의 신작이다. 연출은 〈동백꽃 필 무렵〉과 〈웰컴투 삼달리〉의 차영훈 감독이 맡았다. JTBC 토일 드라마로 방영되며 넷플릭스에서 동시 공개됐고, 제작은 스튜디오 피닉스, SLL, 그리고 스튜디오 플로우가 함께했다. 이 글을 쓰려고 자료를 확인하다가, 제작사 가운데 내가 아는 사람들이 이끄는 스튜디오 플로우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박해영의 작품을 한데 묶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위로'다.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웅크린 사람들, 삶의 무게에 짓눌려 숨죽여 앓는 이들의 밑바닥 감정을 그는 집요하고도 투명하게 들춰낸다. 〈나의 아저씨〉가 '행복'을, 〈나의 해방일지〉가 '자존'을 이야기했다면, 이번 작품이 건네는 것은 '평안'이다. 그리고 그 평안은 늘 혼자가 아니라 타인과 함께 구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엄마'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가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엄마 없이 자란 사람에게 왠지 모를 동정이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그 뻔한 클리셰를 부정한다. 아홉 살 때 아버지의 가출에 이어 어머니까지 집을 떠난 뒤, 홀로 남은 변시온 — 성인이 되어 스스로 변은아로 개명했다 — 에게 하루하루는 지옥이었다. 그녀가 '엄마'라는 존재에 증오와 미움을 품게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드라마의 한 축인 변은아(고윤정)는 잘나가는 영화사 최필름에서 프로듀서로 일한다. 그리고 그녀는 20년째 영화감독 데뷔를 꿈꾸며 좌절과 분노에 빠져 있는 황동만(구교환)을 만나면서, 서로를 구원하게 된다. 어제 이 드라마의 마지막 화를 보면서 나는 여러 군데에서 눈물을 흘렸다.

명품가게 앞에서 — '근사하다'는 말

극중 장미란(한선화)과 변은아가 길가의 명품가게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너는 왜 하이힐을 안 신어?" 장미란이 유리창 너머 하이힐을 바라보며 말한다.

"실례 같아서요. 또각또각. 사람들 시선을 끄는 것 같아서." 변은아가 말한다.

"그래서 신는 건데, 시선 끌려고. 나는 오정희(배종옥)가 한 번도 하이힐을 벗은 걸 본 적이 없다? 연기할 때 빼고. 일단 또각또각 소리로 기를 죽여 놔. 순간적으로 공기를 바꿔 놔. 반드시 이기겠다는 포스를 풍기면서. 허. 그래서 아무도 못 이겨. 존경해, 그런 점. 내가 늙으면 우리 아빠는 건사 안 해도 오정희는 끝까지 책임진다. 그, 왜. 너가 너희 할머니 케어하는 거랑 같은 거야." 장미란이 구두가게를 바라보며 이야기한다.

이어서, "근사한 건 어떤 거야? 멋진 건 알겠는데, 사람이 근사한 건 뭘까? 오정희가 자기 친딸 보고 근사하대."

이 장면 구두가게 앞에는 또 다른 장면이 놓여 있다. 장미란이 한 여배우를 폭행해 억지로 사과를 하러 간 자리.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코너에 몰려 있을 때, 국민배우 오정희가 촬영을 중단하고 의붓딸을 구하러 하이힐 소리를 내며 등장한다. 곧이어 상대방을 납작하게 만들어 놓고 떠나려 하자, 상대 여배우가 정곡을 찌른다. 오랫동안 방치한 친딸이나 돌보라고. 그에 대해 오정희는 이렇게 답한다.

"내 친딸. 너 따위랑은 비교도 안 되게 근사해. 아무에게도 빌붙어 가지 않아. 남자한테도. 부모한테도."

그때 장미란은 새엄마가 말한 '근사하다'는 말을 곱씹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게 앞. 장미란이 무심코 던진 그 말에, 변은아의 얼굴에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스쳐 지나간다. 이윽고 얼굴 가득 눈물이 흐른다.

"근사한 건 어떤 거야? 응?" 장미란이 변은아를 쳐다본다.

"왜, 그래?" 당황한 장미란이 묻는다.

"아…" 변은아가 억지로 눈물을 참으며 얼굴을 피한다.

"어?" 장미란이 당황한다. "왜?" 그러면서 변은아의 옷소매를 잡는다.

"저예요, 변시온. 미안해요, 미리 말 못 해서." 변은아가 말한다.

놀란 장미란은, 잠시 뒤 변은아를 꼬옥 안는다. 너무나 많은 감정이 묻어 있는 장면이다.

이 장면 뒤에는 국민배우 오정희의 마음속 대사가 흐른다. 자기 손에 자라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바람난 남편이 집을 나가자 명예와 출세욕에 홧김에 어린 자식마저 버렸던 오정희가, 서른이 된 딸을 만나면서 받은 신선한 충격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작가로서의 천재성은 물론이고, 자신이 던진 유혹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물리친 딸이 근사하게 보였던 것이다. 이 구두가게 장면은 내가 꼽는 이 드라마의 가장 감동적인 지점이다. 그러나 정작 드라마 공식 홈페이지의 명장면 목록에는 이 장면이 들어 있지 않다.

버릴 게 없는 대사들

국민배우로 한 번도 실패를 겪지 않은 오정희를 엄마로 둔 장미란은, 인기 여배우로서 영화사 기획 PD인 변은아를 알게 되어 그 매력에 빠져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한편 변은아는 최근 자기 회사가 제작한 영화 〈마이 마더〉의 주역이 바로 자기를 버린 엄마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큰 충격에 빠지지만, 여기저기서 동네북이 된 기피 인물 황동만을 만나면서 회복해 나간다.

변은아의 사정을 모르는 영화사 대표는, 1년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날카로운 재능을 '금도끼'라 칭하더니, 그 이후로는 노골적으로 비아냥대며 멸시한다. 이 드라마는 황동만과 변은아가 주연이지만, 비중은 황동만 쪽이 7 대 3쯤은 되는 것 같다. 그 점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양보다 질'이라는 사실을 극중 황동만 자신도 잘 알고 있게끔 그려졌다.

황동만이 세상을 향해 던지는 말들은 버릴 게 하나도 없을 정도다. "내 인생이 왜 네 맘에 들어야 되나"라며 내뱉는 그를 사람들은 귀찮은 존재, 말썽을 일으키는 밉상으로 여기지만, 사실 그 말은 우리에게 비수처럼 꽂힌다. 이 드라마가 흥행 공식을 따르지 않는 '불친절한' 작품이라는 평을 듣는 것도 그래서다. 사랑스럽고 완벽한 주인공도, 친절한 설명도, 자극적이고 빠른 전개도 없다. 대신 시종일관 뼈를 때리는 대사로 우리 안의 나약함과 불안을 건드린다.

강말금이 연기한 고박필름 대표 고혜진은 이 드라마에서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캐릭터다. 쪼잔한 사내들 사이에서 가장 시원시원하다. 주연은 구교환과 고윤정, 조연은 강말금과 그녀의 남편 박경세(오정세), 장미란, 오정희, 변은아가 일하는 최필름 대표 최원영, 그리고 황동만의 형 황진만(박해준)이다. 이 주요 인물들의 캐릭터가 모두 잘 살아 있다. 사실 나는 고윤정의 팬으로서 이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지만, 초반 2회까지는 구교환이 맡은 짜증나는 역할 때문에 보기를 그만둘까도 했다.

국민배우 오정희가 최필름에서 제작을 준비 중인 시나리오를 읽으며 자신의 친딸이 썼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최필름에 들린 오정희 앞에 비겁하기 짝이 없는 남자 감독과 늘 변정아의 심기를 건드리는 8인회 멤버 중 한 명인 최효진 PD가 앉아 있고 뒤이어 최필름의 대표가 변정아를 데리고 들어온다. 아직 그 누구도 변정아가 오정희의 친딸이라는 사실을 당사자들 외에는 모르는 상황이다. 11회에서 오정희가 그 대본은 남주인공이 아니라 여주인공이 맞다고 주장하자 그것을 두고 내부 회의에서 유일하게 반대를 한 변은아를 자기 방에 데리고 들어가 작가 영실이처럼 쓸 줄도 모르면서 말만 앞세운다며 변정아를 힐난할 때 "영실이, 그거 전데요."하면서 한 방 매겼다. 최원영이 변정아와 함께 회의에 참석하자, 오정희는 작가 영실이를 겨냥해 실랄한 지적을 시작한다. 그때 변은아는 괴로울 때마다 터지던 코피가 다시 나오려 한다. 그러나 변은아는 "나는 당신의 말로 죽을 수 없는 존재"라고 속으로 말한다. 보일랑말랑하던 작은 코피가 다시 쏙 들어가는 것을 본 시청자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 같지만, 그런 세세한 연출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정면으로 오정희를 쳐다본다.

황동만이 제작 고사를 지낼 때 좌중에 그의 형, 황지만과의 대화가 나오는 장면은 우리를 숙역하게 만든다.

"인생의 목적이 뭐야?" 촬영을 위해 짐을 싸던 동생에게 묻는다.

"기껏해야 100년. 100년이면 다 사라지는데. 사라지는 것이 진정 존재했던 것인가? 그런 의문을 잠재우기 위해 정신없이 스토리를 써 대지. 살아 있는 한 스토리를 써야 한다면 이왕이면 웃기게. 난 그렇게 못살았지만."이라고 말한다.

이혼하자마자 어린 딸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디론가 입양되어 사라진 것에 대한 좌절과 아픔을 술래 달래며 거의 폐인처럼 살던 황지만. 결국 핀란드에서 딸의 입양 소식을 알게 되면서 통곡하는 그의 뒷모습은 우리를 아프게 한다.

봄은 늘 기다립니다.

첫눈도 기다리고. 가을 하늘도 기다리고.

기다리지 않는 계절이 없습니다.

지금인데.

봄여름가을겨울.

다 지금인데.

바람에 나뭇잎이 하얗게 뒤집어집니다.

시인 황지만은 오랜 절필 끝에 이런 시를 쓴다.

필름에서 디지털로, 그리고 AI

이 드라마는 2024~2026년 한국 영화·드라마 제작사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 같아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영화 말미, 그렇게 천대받던 황동만이 제작한 영화가 시사회에서 환대를 받고 뒤풀이를 하는 장면이 있다. '8인회'의 중심격인 박영수 역의 전배수가 하는 말이 와닿았다. 필름에서 겨우 디지털에 적응하나 했더니 AI가 나타나 좌절감에 빠져 있던 시점에, 후배 황동만의 영화를 보고 다시금 글을 쓰고 영화를 찍겠다고 선언하는 장면이었다.

내 아들이 글을 쓰는 작가의 길을, 그리고 각본을 들고 연출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하는 이 시기는, 공교롭게도 AI가 전방위로 무섭게 성장하는 시기와 맞닿아 있다. 그래서 나는 과연 이 아이의 길에 희망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한다.

비록 유튜브에서 AI가 만든 영상이 확인되면 나 역시 곧바로 빠져나올 정도로, 기계가 만든 영상에 감동받을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우리가 기댈 수 있는 단 하나의 지점

"누가 AI가 만든 음악이나 영화를 듣고 보고 싶겠어?"

아직까지 내 딸과 아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지점이 아닐까.

드라마의 마지막 회 제목은 '감독, 황동만입니다'였다. 20년을 데뷔하지 못하고 좌절과 분노 속에 있던 한 사람이, 끝내 자기 이름 앞에 '감독'이라는 말을 붙이는 이야기.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는 그 제목 그대로, 결국 누군가는 그 싸움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낸다.

이 드라마를 보면 내 아들처럼 미래가 불투명한 젊은이들이 떠 올랐다. 그건 단지 같은 업계의 이야기여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자신의 가치를 의심하고 또 증명해 나가는 모든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근사한 건 어떤 걸까. 아무에게도 빌붙지 않고, 불안 속에서도 끝내 자기 글을 쓰는 사람. 나는 내 아들이 그렇게 근사한 사람이 되리라 믿는다.

 


고윤정 인스타그램

인스타 팔로워가 1,231만이다.

고윤정의 작품 중에 환혼, 환혼: 빛과 그림자, 무빙, 언젠가는 슬기로운 전공의 생활, 이 사랑 통역 되나요? 등을 봤는데, 그 중에서 이 사랑 통역 되나요?를 본 후 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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