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이라는 마른 우물에 붓는 한 바가지 물

고전이라는 마른 우물에 붓는 한 바가지 물
김세연 『단순함의 순정』과 실존적 독서의 복원
문학의 종언이 너무 쉽게 발화되고 AI의 문장이 인간의 문장을 흉내 내는 이 시절에, 김세연의 『단순함의 순정』은 기이하리만큼 시대착오적이며 바로 그 이유로 동시대적인 책이다. 이 책은 고전을 친절히 해설하려 들지 않는다. 명작의 줄거리를 요약하거나 작가의 생애를 정리해 독자의 부담을 덜어 주지도 않는다. 김세연은 오히려 고전이라는 거대한 산맥 앞에서 가장 사적이고 가장 비문학적으로 보일 자기 기억을 먼저 꺼내 든다. 그에게 고전은 박제된 교양의 목록이 아니라, 유년의 공포와 전쟁의 열기, 가난과 콤플렉스, 고향의 흙냄새와 사라진 얼굴들을 다시 불러내는 실존의 촉매다.
『단순함의 순정』이 스스로 내세우는 이름은 '마중물 문학'이다. 이 한마디만큼 이 책의 성격을 정확히 드러내는 말은 없다. 김세연은 자신이 고전 그 자체를 대신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책을 "고전의 미끼용"이라 낮춰 부른다. 그러나 그 낮춤에는 묘한 자부심이 깃들어 있다. "평생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이들을 위해서라도 누군가는 먼저 한 바가지 물을 부어야 한다는 의식, 곧 메마른 독서의 펌프를 다시 움직이게 해야 한다는 문학적 책임감이 그 안에 있다. 그래서 그는 통상적 감상평의 문법을 거부한다. 지은이와 줄거리, 서두와 결말을 설명하는 대신 "나와 관련 있는 한두 가지"를 들추어 낸다. 이미지를 우선하고, 이를 "현미경적 분석"이라 명명한다. 이 짧은 선언 속에 『단순함의 순정』의 거의 모든 방법론이 들어 있다. 이 책은 고전을 요약하지 않는다. 고전과 부딪힌 한 인간의 상처 난 지점을 확대한다.
김세연의 독서법은 정통적 의미의 비평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작품 전체를 공정하게 조망하려 하지 않는다. 『데미안』을 말하면서 헤세의 사상 체계를 정리하기보다, 매일 담배를 피우게 하고 철조망 밑을 기어 밤을 줍거나 고구마를 파오게 했던 유년의 실제 폭군, 곧 자기 삶의 프란츠 크로머에게 붙들린다. 소설 속 크로머는 싱클레어를 어둠의 세계로 끌고 들어가는 악동이지만, 김세연에게 크로머는 허구가 아니라 살갗에 남은 공포다. 그러므로 『데미안』은 그에게 교양소설이기 이전에 유년의 압박과 굴욕을 다시 대면하게 하는 거울이다.
『이방인』의 경우는 더 처절하다. 카뮈의 부조리는 사변적 개념이 아니라 베트남전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되살아난다. 그는 논에서 일하던 현지 농부가 분무기를 쳐드는 모습을 무기로 오인해 방아쇠를 당겼던 기억을 꺼내며, "뫼르소는 내 총구 앞에서 나를 비웃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이 한 문장은 김세연식 독서의 본질을 가장 강렬하게 드러낸다. 그는 뫼르소를 이해한 것이 아니다. 뫼르소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방인』은 카뮈의 텍스트가 아니라, 전쟁 이후 가족과 사회와 친구들에게서 멀어진 한 인간의 자기 명명으로 바뀐다. '이방인'은 더 이상 소설 속 인물의 이름이 아니라, 김세연 자신이 끝내 도달한 실존의 지위다.
『차륜 밑에서』의 한스 기벤라트 역시 교육 제도의 희생자이기 이전에 작가 자신의 유약하고 상처받은 어린 시절을 비추는 거울이다. 초등학교 내내 우등생이었고 낚시와 토끼 기르기를 좋아했던 소년은 중학 시절 현실의 크로머 같은 폭력적 인물에게 시달리며 지옥 같은 시간을 통과한다. 한스가 학교와 사회의 차륜 아래 짓눌렸다면, 김세연은 또래 폭력과 유년의 공포라는 차륜 아래 놓여 있었다. 이렇듯 그는 고전 속 인물을 자기 기억 속 인물로 되살리고, 작품의 사상을 자기 삶의 혈흔 위에 다시 쓴다. 고전은 그에게 지식이 아니라 상처를 객관화하는 장치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단순함의 순정』은 위험하면서도 매혹적이다. 객관적 비평의 눈으로 보면, 김세연의 읽기는 때로 지나치게 사적이고, 때로는 작품을 자기 경험의 재료로 과감히 끌어내린다. 그러나 그 과감한 사유화야말로 이 책의 문학적 에너지다. 그는 고전을 안전한 진열장 위에 올려놓지 않는다. 도스토옙스키, 헤세, 카뮈, 지드, 로맹 롤랑, 포, 프루스트, 괴테는 그의 문장 속에서 다시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늦은 밤 술 취한 목소리로 되살아나며, 고향과 전쟁터와 출판사의 어두운 복도 속으로 불려 나온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 고전은 '읽힌다'기보다 '살아진다'. 김세연은 고전을 머리로 통과하지 않고 몸으로 통과한다.
그 몸의 독서를 떠받치는 가장 깊은 축에 도스토옙스키가 있다. 김세연에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한 편의 작품을 넘어 문학적 신전의 중심에 놓인 제단에 가깝다. 그는 알료샤에게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순정한 영혼의 가능성을 보고, 문학이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영혼의 황홀경, 곧 법열에 이를 수 있음을 감지한다. 알료샤와의 만남에 크게 흥분했다는 그의 고백은 단순한 애독자의 감탄이 아니다. 그것은 김세연 문학의 종교적 심장에 관한 증언이다. 여기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신비적 합일, 곧 인간이 신과 하나라는 명제, 둔스 스코투스의 존재의 단일성, 그리고 칸트의 물자체에 대한 불가지론이 겹치면서 그의 독서는 단순한 감상문의 차원을 넘어선다. 사물 그 자체를 완전히 알 수 없다는 깨달음 속에서 그는 오히려 문학으로 들어설 수 있는 가벼움을 얻는다. 알 수 없기에 써야 하고, 완전히 붙잡을 수 없기에 자기 기억의 한 장면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보아야 하는 것이다.
문체 또한 이 책의 중요한 사건이다. 김세연의 문장은 매끈하지 않다. 그것은 논리적 비평문이라기보다 판소리의 타령조에 가깝고, 때로는 술 취한 사람이 오래 묵힌 기억을 풀어 놓는 넋두리처럼 들린다. 실제로 책 속에는 「찬실이 타령」, 「영랙이 타령」, 「금식이 타령」, 「쇠줄이 타령」, 「별호 타령」 같은 글들이 날것 그대로 섞여 있다. 그는 거기서 "오호통재라" 탄식하고, "이 일을 어쩌랴!" 혀를 찬다. 인물의 기구한 사연은 세련된 소설적 묘사로 정리되지 않는다. 동네 어르신의 한풀이처럼, 판소리 창자의 사설처럼, 구전설화의 능청스러운 입말처럼 풀려 나온다.
이 불균질한 문체는 결함이면서 동시에 김세연 문학의 핵심이다. 그는 문장을 지나치게 다듬어 상처의 냄새를 지우지 않는다. 세련된 비평이 감추는 것을 그는 드러내고, 교양 있는 문체가 누그러뜨리는 것을 그는 다시 거칠게 세운다. "쇠줄이란 놈은"으로 시작되는 문장들, "물었것다"와 "것이렷다"의 반복, 마을 사람들의 엇나간 인생을 향한 탄식은 모두 김세연 문학의 하층 리듬을 이룬다. 이 문체는 논리로 설득하지 않는다. 대신 독자를 작가의 의식 흐름 속으로 끌고 들어가, 그 체험의 진실성에 감염되게 만든다.
『단순함의 순정』은 그래서 고전 안내서이면서 동시에 반反안내서다. 독자에게 고전을 쉽게 요약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이 책은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당신에게도 프란츠 크로머가 있었는가. 당신에게도 한스 기벤라트의 차륜이 있었는가. 당신은 어느 순간 뫼르소처럼 세계의 바깥에 서 본 적이 있는가. 서머싯 몸의 「비」를 읽으며 인간의 신념이 육체 앞에서 무너지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김세연이 말하는 마중물은 결국 작가 자신의 기억만이 아니다. 그것은 독자의 기억을 불러내기 위한 장치다. 고전은 모두의 책이지만, 고전에 들어가는 문은 각자의 상처에 있다. 이 책은 바로 그 문 앞에서 독자의 등을 떠미는 손이다.
이러한 태도는 기성 문단과 지식 풍토를 향한 그의 불신과도 맞닿아 있다. 김세연은 문학을 권위의 장식물로 만들려는 태도, 책의 목차와 서문만으로 교양을 흉내 내는 태도, 유행과 포장으로 문학의 본질을 희석하는 태도에 대한 적의를 굳이 감추지 않는다. 그는 문학을 향해 고통스럽고 성실한 산행을 계속하라고 말한다. 문단이라는 패거리의 권위에 기대지 말고, 한 개인으로 돌아가 문학이라는 험준한 산을 향해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함의 순정』의 거친 문장과 비약적 구성은 단순한 산만함이 아니다. 그것은 매끈한 제도 문학에 대한 의도적 불복종이며, 자기 몸을 문학의 실험대 위에 올려놓는 한 방식이다.
그의 창작관 또한 완고하다. 김세연은 역사물이나 취재물을 단순히 재료로 삼는 창작을 경계하고, 소재와 배경과 인물이 작가 자신의 머리에서 새로 창조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창조하라"는 그의 명령형 문장은 고전을 다루는 이 책에도 역설적으로 적용된다. 『단순함의 순정』은 고전에 기대어 쓴 책이지만, 고전을 빌려 쓴 책은 아니다. 그는 고전을 해설하지 않고, 고전과 자기 기억이 충돌하는 자리에서 제3의 텍스트를 만들어 낸다. 그 결과 이 책은 서평도, 회고록도, 독서 안내서도 아닌 독특한 혼종의 글쓰기가 된다.
결국 『단순함의 순정』은 김세연 문학이 오래 추구해 온 '채홍'의 또 다른 형식이다. 시와 소설, 에세이와 평론, 고전과 유행가, 전쟁과 고향, 철학과 동시가 한데 뒤섞여 하나의 무지개를 이룬다. 작가는 스스로를 "문학의 기니피그"로 내세우며, 전 생애를 통하여 단 하나의 작품을 향해 쓰고 지우고 덧칠하는 일을 자기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그 무지개는 질서정연한 학문적 체계가 아니라, 평생을 방황한 한 인간이 남긴 정신의 흔적이다.
김세연이 회복하고자 하는 순정은 순진함이 아니다. 그것은 고전의 난해함과 삶의 비루함을 모두 통과한 뒤에도 끝내 사라지지 않은 맑은 응시다. 『단순함의 순정』은 그 응시의 기록이며, 고전이 아직도 상처 입은 인간을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오래된 믿음의 갱신이다. 그는 고전을 모셔 두지 않는다. 자기 상처의 흙탕물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고전은 다시 살아 움직인다. 이 책의 가장 큰 힘은 바로 거기에 있다. 단순함은 얕음이 아니라, 온갖 방황과 수치와 공포와 법열을 지나 끝내 남은 정신의 마지막 순도다.
출판 기념식 - 작가 (오른쪽 앞)
나는 작가 김세연 선생과는 1989년부터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이번 글은 김세연 작가에 대한 두 번째 평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