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외우듯, 인생을 외우듯

올해 들어 5월이 언제 돌아왔는지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THE OFFICE'라는 푯말이 붙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디 오피스'는 내 아들이 초등학생 때부터 가장 좋아하던 미국 드라마의 제목으로, 그가 자기 방 문에 붙여 두었던 것인데 2018년 말 새 집으로 이사한 이후로는 내 방 문에 붙어 있다. 그사이 나는 업무차 이탈리아에도 다녀왔고, 아들 덕분에 샌프란시스코 여행도 다녀왔다. 밤늦게까지, 때로는 새벽까지, 심지어 하루를 꼬박 새우는 생활이 이어졌다. 동네 산책조차 제대로 못 하는, 그야말로 건강과는 거리가 먼 일상이다. 그러던 차에 지금은 다시 동네 근처 국제공항에 나와 있다. 급하게 이탈리아 밀라노에 다녀와야 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남들이 들으면 팔자 좋다 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급히 일정을 잡아 떠나야 하는 일이란 대개 그런 종류와는 거리가 멀다.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하니 결국은 손실을 의미한다. 더 큰 손실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움직이는 것이므로, 낭만과는 거리가 먼 그저 업무의 일부일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매사를 가능하면 긍정적이고 낙천적으로 받아들이려는 편이라, 이번에도 담담하게, 가능하다면 즐겨 보려 했다.
이번에 에어비앤비를 예약했는데, 호스트의 답장이 너무 느려 답답해하던 차에 갑자기 연락이 왔다. 정부로부터 막 통보를 받았다며, 투숙 전에 여권 스캔본을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운전면허증은 안 되고 반드시 여권이어야 한다고, EU 정부가 결정한 사항이라고 했다. 나는 곧바로 예약을 취소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동안 내가 보낸 질문에도 제대로 회신이 없었던 데다, 아직 예약이 확정된 것도 아니었으니 마음에 걸릴 게 없었다.
대신 호텔을 더 싼값에 예약했다. 마침 5월 2일에 스피릿(Spirit) 항공사가 갑자기 파산하면서 전 세계 약 180만 명의 여행객이 큰 불편을 겪게 되었고, 그 여파로 주요 여행지마다 예약 취소가 잇따르고 있었다. 밀라노 지역 호텔을 검색해 보니 큰 폭으로 할인하고 있었다. 하루 이틀 앞두고 빈방이 있다면, 손실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큰 폭으로 할인해 채우는 것이 당연한 선택일 것이다. 어쨌든 호텔을 예약해 두고는 별생각 없이 지내다가, 하루가 지난 뒤에야 에어비앤비 앱으로 돌아와 취소를 진행했다. 돋보기를 썼어야 했는데, 아침에 막 눈을 뜬 채 침대에 누워 별 확인도 없이 취소 버튼을 눌러 버렸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결제한 금액의 10%만 환불받을 수 있었다. 꼼꼼하지 못한 성격 탓에 이따금 저지르는 실수다.
당시 내가 호텔을 선택한 이유는, 여권 정보를 호텔도 아닌 개인에게 스캔해 보내는 일이 여간 찜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에어비앤비를 운영하는 사람들 중에는 별의별 이가 다 있는데, 여권 정보를 미리 보내야 한다면 그걸 누가 선뜻 동의하겠는가? 이번에 알았지만, 이 플랫폼에 그동안 얼마나 불신이 쌓였는지를 보여주는 정책 변화가 눈에 띄었다. 예전에는 바깥에 보이는 가격 외에도 막상 결제 단계에 들어가면 청소비, 각종 세금 같은 항목이 줄줄이 추가되곤 했다. 비교해 보느라 쓴 시간이 아까워 그냥 결제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번에 그 부분은 확실히 고쳐 놓았더라. 하지만 이번 일처럼 개인 사업자에게 여권 정보를 보내야 한다면 누가 이용하겠는가? 나는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손해를 봤지만, 에어비앤비를 상대로 이의를 제기해 받아낼 생각이다. 결제하기 전에 예상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 업체를 이용할 일은 더 이상 없을 것 같다.
살면서 우리는 이런저런 손해를 보며 산다. 모르는 사이에 매달 빠져나가던 금액을 몇 년이 지나서야 발견하기도 하고, 덜렁대는 실수의 대가를 치르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 일에 매여 하루 종일 기분이 가라앉아 있으면, 결국 손해 보는 쪽은 나 자신뿐이다.
(여기까지는 뉴어크 국제공항(EWR)에서 쓴 글이었다.)
지금은 밀라노 말펜사 국제공항에서 탑승을 기다리고 있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다. 이번 출장에는 작은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밖에서 청소차의 요란한 작업 소리에 잠이 깼다. 반사적으로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내 폰은 디지털이 아니라 아날로그 방식으로 시각을 표시하는데 — 아뿔싸, 시계가 7시를 넘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9시 45분 이륙이니, 지금 당장 뛰어나가 기차만 잘 잡으면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기차 시간만 맞아 준다면 말이다. 중앙역에서 말펜사 공항까지는 고속 기차로 50여 분이 걸린다. 6시에 알람을 맞췄는데 내가 소리를 듣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충분히 잠을 잔 덕분에 머리는 개운했지만, 그 대가가 너무 컸다.
나는 그야말로 전광석화처럼 여기저기 널브러진 물건들을 작은 백팩에 욱여넣었다. 알디(Aldi)라는 독일 기업이 있는데, 미국에서도 꽤 인기가 있고 유럽 곳곳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할인 마켓이다. 식품에서부터 간단한 편의용품까지 두루 갖춰져 있는데, 특히 과자류가 아주 싸다. 지난 1월인가 2월인가, 아내와 왔을 때 미국에 비해 과자값이 몇 배나 싸서 한 보따리를 샀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이들이 잔뜩 기대하고 있어서, 이번에는 호텔에 빈 가방을 들고 가서 나름대로 과자를 몇 개 사 두었는데 그것들이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달랑 등에 매는 가방 하나만 갖고 간 탓에, 짐을 욱여넣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집에서 갖고 온 실내화, 양말 등 몇 가지가 눈에 들어왔지만 미련 없이 포기하고 로비로 뛰어 내려갔다. 키를 반납하고 밀라노 중앙역(Centrale Station)을 향해 내달렸다.

다행히 역이 멀지 않아 단숨에 도착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사람들은 역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고, 그 거대한 건물의 출입문은 모조리 잠겨 있었다. 건물을 한 바퀴 돌며 확인해 봐도, 마치 나를 거부하기라도 하듯 모든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그제야 나는 폰을 꺼내 시간을 다시 들여다봤다. 새벽 1시 45분쯤이었다.
나는 다시 호텔로 돌아갔을까, 아니면 문이 열릴 때까지 바깥에서 기다렸을까? 이미 체크아웃을 했으니 호텔이 나를 다시 받아들일지는 정말로 미지수 아닌가? 그제서야 주변을 살펴보니 여기저기 누워서 잠을 청하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셨을지 궁금하다.
(지금은 비행 중에 글을 쓰는 중이다. 모바일 신호가 잡히면 업데이트될 것이다.)
3시간 후면 뉴어크 공항에 도착한다. 밀라노로 갈 때와 달리 옆자리가 비어 있어 편안하게 가는 중이다. 나는 홀로 비행기 티켓을 끊을 때 좌석은 가장 싼 것을 고른다. 그러다 보면 좌석을 직접 고르지 못하고, 항공사가 마지막에 배정해 주는 대로 탄다. 밀라노로 갈 때는 창 쪽 3열의 가운데 자리였는데, 좌우에는 이탈리아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앉아 있었다. 둘 다 아주 친절했다. 내가 자리를 비울 때면 나를 대신해 물도 받아 주고, 내가 여권을 잃어버렸을 때에는 휴대폰 불을 켜서 찾느라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결국 창가 쪽에 앉아 있던 젊은 사내 쪽 비행기 벽 바닥 틈에 박혀 있던 여권을 발견했다. 내가 윗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낼 때 튕겨 나갔던 것 같았다. 그 젊은이는 내게 커피 한 잔 사라고 농을 던졌는데, 사실 그 친구가 휴대폰을 충전하지 못해 쩔쩔맬 때 내가 충전기를 빌려줘 도움을 주기도 했다.
내릴 즈음, 내가 명함을 건네며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했더니 커피 한 잔하자며 웃었다. 친구가 픽업하러 기다리고 있어 곤란하다고 정중히 사양했다. 사실이기도 했다. 가끔 나쁜 사람들도 있지만, 세상의 보통 사람들은 다 괜찮은 이들 천지다. 문제는 헌법이나 법률에 의해 합법적인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쥔 자들이 이 세상을 자기 욕망대로 휘두르는 탓에, 평범한 우리들만 곤욕을 치른다는 사실이다.
내가 정말 쓰고 싶은 소설이 하나 있다. 바로 이 세상의 모든 민주주의적 정치 구조를 엎어 버리는 혁명에 관한 이야기다. 낡아빠져서 도저히 적용할 수 없음에도 버젓이 법의 탈을 쓰고 억압의 도구로 변질된, 이 세상의 모든 민주주의라는 가면을 쓴 악마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도발적인 내용이다.
아, 중앙역에서의 내 선택은 호텔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키를 반납하고 퇴실은 했지만, 그 방은 아직 청소를 시작하지 않았을 테고 그렇다면 허락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다만 너무 시간을 지체하면 변수가 생길 수 있었다. 나는 방향을 잡고 뛰었다. 완전히 반대 방향은 아니었지만, 아주 멀리 빙― 돌아가는 길이었다. 호텔에 들어서니 내게서 키를 받았던 청년이 카운터에 있었다. 아침 9시 45분 비행기인 줄 착각해 급하게 나갔었다고 말하니, 그 친구가 이미 퇴실 처리를 했는데 다시 들어가기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답하니 시스템에서 뭔가 조작을 하더니 키를 다시 건네줬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속옷 차림이 된 채 가방에서 물건을 모두 꺼내 다시 정리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한바탕 소동을 가족 카톡방에 써넣었다. 현지 시간은 저녁 8시 무렵이었다. 곧이어 딸아이가 카톡 보이스를 걸어왔다.
딸의 폰을 통해 한바탕 소동에 대해 떠들었다. 얼마나 웃었는지 내 웃음소리가 이상하게 들렸는지, 아들이 "아빠 목 졸리는 것 같으니 호텔에 연락해 보라"고 소리치는 목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그날 아내가 학교에 가서 캡스톤 발표를 하고 돌아온 이야기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캡스톤은 석사과정에서 논문을 대신하는 최종 프로젝트다. 한국에서도 요즘은 석사과정에서 논문이 폐지되었다고 들었는데, 미국은 오래전부터 논문 대신 캡스톤을 발표하게 한다. 나도 MIT와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마지막 한 학기 동안 캡스톤 프로젝트를 이끈 경험이 있다. 전공 종류마다 다르겠지만, 경영 계열의 경우는 그룹 단위로 캡스톤을 진행하는 듯했다.
아내가 말하길, 캡스톤 발표를 하기 위해 단상에 섰는데 왠지 너무 마음이 편하더라고 했다. 그래서 아주 잘 마쳤다고 했다. 내가 말했던 대로 잘했다고 해서, "최우수상 수상자라는 격에 맞게 잘한 것 같아 다행"이라고 농을 던졌다. 며칠 전 아내가 발표를 걱정하길래 내가 말했었다. "시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를 완전히 외우면 된다." 실제로 우리가 외우고 있는 시는 왠지 잘 이해할 수 있는 느낌이 든다. 반면에 그렇지 못한 시는 사실 잘 이해하지 못한다.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으면 무대에 나가서도 준비 자료 없이 청중에게 편안하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아이디어는 내가 요즘 즐겨 보는 넷플릭스 드라마의 한 대목에서 따온 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We Are All Trying Here)〉라는 제목의 드라마인데, 고윤정은 극 중 변은아라는 인물로, 한 영화사에서 PD로 일하고 있다. 정곡을 찌른다고 해서 '도끼'라는 별명을 갖고 있지만, 지금은 회사 대표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있고 이때다 싶어 다른 동료들도 외면하는 존재다. 그녀가 하루는 남자 주인공 황동만(구교환)의 형 진만과 신호등 앞에서 함께 기다리며 묻는다.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이해할 수 있냐고. 진만은 시를 외우면 된다고 무심히 내뱉는다. 그는 이혼 후 전처가 데리고 간 어린 딸이 어딘가에 입양된 사실을 알고 괴로워하는 사내로, 동생 동만과 함께 허름한 아파트를 얻어 생계를 위해 용접 일이나 노동품을 팔며 살아가는데, 깡소주를 마시며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아직 4회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 드라마는 요즘 보기 드문 수작이다. 더구나 내가 〈환혼: 빛과 그림자〉에서 낙수 역의 고윤정을 눈여겨보다 〈이 사랑 통역되나요?〉의 차무희 역에서 완전히 반했는데, 그녀가 주인공을 하니 자연히 눈이 가는 것 같다.
아무튼 내 아내는 나의 조언에 영감을 받았을 것이다. 발표할 내용을 아예 외워 버렸을 것이다. 한 번 외우면 상황이 어떻게 되더라도 교수 앞에서 담담해진다. 아내 표현처럼 "마음이 편해졌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원래 내 아내는 큰 무대일수록 대담했다.